천운이세요!!

by 이야 아저씨


10월 마지막 한 주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우연히 들른 전원마을에서 마음에 드는 나대지가 눈에 띄었다.

땅주인 연락처가 적혀있는 팻말이 꽂혀 있기에 별생각 없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대지면적과 매매가격을 물어보니 예정가격대는 초과했지만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인 듯했다.

일단 부딪쳐 보자는 마음에 만날 장소와 날짜를 정했다.


나흘 후 양평에 있는 한 호텔 커피숍에서 땅주인을 만났다.

사전에 군청에 가서 궁금한 사항을 미리 확인한 후라 매매금액이 관건이었다.

땅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 오가고 매매가격을 1차로 합의했다.

계약이전에 몇 가지 확인을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대지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도 만나봤다.

앞으로 짓게 될 집의 윤곽도 머릿속에 상상을 해 보았다.

약간의 부담은 있었지만 리스크는 차후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고민후 아내와 의논 끝에 최종 결심을 했다.

땅 주인과 매매금액 협의도 끝이 났다.

인근 부동산 대표님이 소개한 법무사 사무실에서 만나 직접 계약을 하기로 했다.

날짜와 시간을 약속했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전원주택에 살기로 결정하고 양평에 땅을 산지도 5년이 훌쩍 지났다.

양평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한 지도 벌써 2년이 되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땅을 샀지만 그 땅에 아직도 집을 못 짓고 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아집을 부리는 한 사람으로 인해 나와 아내는 선의의 피해자가 되어 버렸다.

지난 5년 동안 아내와 같이 속앓이를 하며 살았다.

그 대안이 이제야 마련된 것이다.

땅도 마음에 들었다.

바로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허탈한 심정으로 살았던 5년을 마침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계약 하루 전, 신분증과 도장을 챙겼다.

이틀 전 가계약금을 주겠다는 제의에도 그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었다.

뭐 별일 있겠어하며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평상시처럼 하루가 지나고 저녁 8시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땅주인이었다.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인사를 나눈 후 첫마디가 계약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더 높은 가격으로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도장만 찍지 않았을 뿐 구두계약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계약 14시간 전에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이다.

황당한 심정이었다.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며 추가 제안을 했지만 이미 변심한 마음을 돌리기는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한 번 속은 기분이었다.

처음은 부동산업자에게, 그리고 이번에는 땅주인에게.

당장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와 아내는 한동안 말없이 침묵했다.

땅으로 인해 해진 마음의 상처가 다시 긁혔다.

아물려면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스스로 서로의 마음을 다독거렸다.


며칠 후 "2025 서울 건축박람회" 무료 입장권이 왔다는 알림이 도착했다.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사전 입장 등록 신청을 해 놓았다.

건축 자재와 요즘 트렌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관심은 이미 사라졌지만 마지못한 심정으로 아내와 같이 박람회에 가서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저녁 무렵 아파트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낯익은 얼굴이 내렸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중개인이자 불발로 끝난 금번 부동산 계약을 위해 법무사를 소개해 준 여성 대표님이었다.

최근 사정을 간단히 알려 드렸다.

법무사 소개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드리고 계약이 성사되지 못한 아쉬움도 표현했다.

그때 부동산 대표가 활짝 웃으며 우리 부부에게 진심 어린 한마디를 던지며 돌아섰다.


"아유, 천운이세요!!"


예상치 못한 한마디가 일주일 동안 마음속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아쉬움과 분함을 순간에 해소시키는 기분이었다.

위로의 말도, 달래는 말도 아니었다.

결과가 결코 나쁘지 않다는,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하나의 아픈 상처가 아니라 수렁에서 건져진 듯한 느낌이었다.


문득 "연탄 한 장"이란 시가 생각났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중개사님이 툭 던진 그 한마디는 나와 아내에게 따뜻한 연탄 한 장이 되었다.

그것으로 우리 부부는 지옥에서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도 상처 입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될 수 있는 멋진 한마디를 할 수 있을까?

시인의 다른 글처럼 나도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삶의 쳇바퀴를 열심히 돌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