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방이 필요한 이유

by 이야 아저씨


대학 졸업 후 드디어 내 양손이 자유로워졌습니다.


학창 시절 들고 다녔던 가방을 내던지고 지갑하나만 달랑 남았거든요.

하루에 담배 한 갑정도 피우던 때였으니 담뱃갑과 일회용 라이터도 있었겠네요.

지갑은 바지 뒤 왼쪽 주머니에, 담배는 옆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부분 남자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건 이 두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뒷 주머니에 도끼 빗을 꼽고 다니는 멋쟁이(?)들도 있었지만 아주 드문 경우였습니다.

아, 또 하나가 있었네요.

전화번호가 적힌 자그마한 수첩입니다.

그건 바지 뒤 오른쪽 주머니나 셔츠 앞 주머니에 넣어 다니곤 했습니다.

가나다순으로 이름과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어 다녔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이야기입니다.


90년대 초, 벽돌폰이라 불리던 커다란 무선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소장품이었지요.

전화기 충전을 위해 차를 갖고 있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90년대 중반이 되자 일반인들도 휴대폰을 하나씩 갖게 되었습니다.

직장인이었던 저도 당연히 휴대폰을 사용했습니다.

몸에 지녀야 할 소지품이 하나 더 생긴 것이지요.

휴대폰에 전화번호 저장기능이 있어 수첩은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지갑, 휴대폰 그리고 담뱃갑만이 내 주머니 속에 남아 있었지요.

바지 주머니가 네 개니 소지품 세 가지를 넣고 다니는 데 큰 불편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양손은 자유로웠지요.


어느 날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더군요.

통증이 지속되진 않고 나아졌다가 아프기를 반복했습니다.

30대 중반이었으니 허리에 이상이 있을 정도의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방송에서 그럴듯한 정보를 들었습니다.

바지 뒷주머니에 두툼한 지갑을 넣어 두면 허리가 아픈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

앉은 자세에서 골반이 틀어져 허리 통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설마 했지만 밑져봐야 본전이란 생각이 들어 뒷 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바지 옆 주머니로 옮겼습니다.

며칠이 지나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허리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지더군요.

그 이후 바지 뒷 주머니는 항상 비워 두었습니다.

얼마 동안은 지갑을 바지 앞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더군요.

핸드폰과 지갑, 그리고 담배를 앞주머니에 넣으니 무겁기도 하고 걷는데도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안주머니가 있는 쟈켓을 더운 여름에도 걸쳐 입기 시작했습니다.

몸에 걸쳐 입는 걸 유난히 번거로워했던 나로서는 파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지갑을 바지주머니에서 쟈켓 안주머니로 옮기고 나니 그제야 몸과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가끔씩 손수건을 갖고 다니기도 했지만 손가방이 필요하진 않았습니다.

여전히 양손을 자유롭게 앞뒤로 휘저으며 다닐 수 있었습니다.


40대 중반이 넘어서자 갑자기 몸에 지녀야 할 물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양쪽 눈 시력은 1.0 정도인데 가까운 곳에 있는 글씨를 읽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노안증상이라 하더군요.

안경을 맞췄습니다.

가능한 한 작은 사이즈로 사서 쟈켓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직장에서 직급이 높아지면서 명함지갑과 년간 일정을 적는 수첩형 다이어리도 갖고 다녀야 했습니다.

어느 순간 윗도리 옷이 무거워져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더군요.

바지에 핸드폰과 담배, 쟈켓에 지갑, 안경, 명함지갑, 수첩형 다이어리와 필기구.

주머니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는 깨달았습니다.


아내에게 손가방을 사 달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게 가방을 사 주더군요.

퀼트에 푹 빠져있던 아내는 손수 가방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크기와 기능을 고려해 다양한 종류의 손가방을 만들어 내게 건네주었습니다.

내 취향을 고려한 맞춤형이라 백화점에서 산 것들보다 훨씬 맘에 들더군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내가 퀼트로 손수 만든 가방을 들고 다녔습니다.

대학 졸업 이후 가방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지 20년이 지나 다시 그것을 손에 쥐게 된 것이지요.


학창 시절 16년 동안은 배움이란 이유로 가방에 책과 노트를 넣고 다녔습니다.

60대인 지금은 편의성 때문에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물건도 회사에 다닐 때와 달라졌습니다.

금연으로 담뱃갑은 이미 15년 전에 사라졌습니다.

명함지갑과 수첩용 다이어리가 없어진 대신 무선 이어폰과 자동차 키 그리고 물티슈 등 잡동사니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에 따라 가방 속 내용물도 매번 달라집니다.

주머니보다 분실의 우려도 줄어드니 이젠 가방 없이 밖에 나가는 것이 오히려 불편할 지경이 되었지요.


"소지품을 최소한으로 줄여 볼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예전처럼 두 팔을 자유롭게 흔들고 다닐 수 있게요.

그러다 이내 포기했습니다.

두 팔보다는 마음이 편한 쪽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도 물건을 챙기지 못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아내한테 타박을 받기도 하지만 예전보다는 실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평생을 가방과 함께 한 여성들과 실수의 횟수를 비교하긴 어렵지요.


양손이 자유롭기 원했던 내게 가방은 이제 몸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한 손은 묶였지만 그 덕에 마음은 더 평안해진 듯해서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