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덴바지 한벌

by 이야 아저씨


스판기능이 있는 골덴바지 한벌.


아마 1999년도 겨울에 구입을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당시만 해도 기모로 된 것이나 방한용 바지를 제외하면 겨울용으로 최고 따뜻한 바지였습니다.

벌써 27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내 나이도 36세에서 63세가 되어 버렸네요.


그 해 부산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현장에 부임을 했습니다.

2002년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위한 숙소를 짓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내려가려 했지만 살아보니 쉽지 않더군요.

숙소에 직원들과 같이 사는 것도 불편했지만 격주마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 모두 부산 해운대 신시가지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이들도 초등학교 저학년이라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해운대는 3년간 우리 가족의 주 생활권역이 되었습니다.


부산 해운대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살기에는 최고의 동네입니다.

뒤쪽에 장산이 있고 앞으로는 아름다운 해변이 길게 뻗어 있습니다.

인근에 달맞이 고개, 광안리, 기장, 송정등이 있어 부산에서 볼거리와 먹거리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살아보면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삶의 매력을 느껴 볼 수 있는 곳이지요.


핵심지역은 해운대 구청을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입니다.

해운대 시장, 해수욕장, 주변 고급 호텔, 온천, 백화점, 음식점등 다양한 건물들과 시설들이 반경 1킬로미터 이내에 모여 있습니다.

아이들은 물론 손님들이 오면 거기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바다를 보며 모래놀이도 하고 맛있는 음식까지 먹으니 그보다 놀기 좋을 곳이 없지요.

쇼핑을 하러 가끔 시내 큰 백화점에 갈 때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해운대에서 해결이 가능했었습니다.


해운대에는 백화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리베라 백화점'

서울에 있는 리베라 호텔과 전혀 연관이 없는 지역 토속 백화점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상품의 구색도 갖춰져 있고 시내 백화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시설들을 갖춘 백화점이었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그 백화점에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황금빛 색깔의 골덴바지를 발견했습니다.

색깔은 물론이고 적당히 스판 기능이 있어 입기에 무척 편리해 보였습니다.

아내에게 당장 사 달라고 했었지요.

그 이후 지금까지 매년 겨울이 되면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입는 것이 바로 그 바지입니다.


무려 이십칠 년이란 세월을 나와 함께 했더군요.

그 이전에도 사실 골덴바지를 여러 번 사서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색깔과 질감의 바지를 구입했지만 몇 번 입어보고 옷장 한편에 자리만 차지하기 일쑤였습니다.

뻣뻣한 재질감이 싫었고 살 때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색깔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그래서 결국 거의 새것인 상태로 재활용 의류통으로 폐기 처분되었습니다.

옷을 사고 늘 후회한 경험이 많았던 저에게 27년 동안 입은 옷은 이 골덴바지가 유일한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헐렁거리는 단추를 꿰맨 것 외에 손 본 곳이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주머니도 터진 곳 하나 없는 걸 보면 재질이 좋고 박음질이 꼼꼼하게 잘 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스판 기능까지 있으니 어디서나 편하게 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베스트 상품이었지요.

그런데 얼마 전 바지 무릎 부분이 낡아 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새것을 구입할 때가 됐다는 걸 알았지만 '이것만큼 마음에 드는 바지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더군요.

일 년을 더 버텨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뿔싸!

그런데 아내에게 바지무릎 해진 것이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이번 겨울도 거의 끝났으니 그만 버리라고 하더군요.

나의 애착템인 것을 알기에 강하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이제 이별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틀 전, 골덴바지를 입고 손주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버리기 전 마지막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을 느껴보고 싶더군요.

그날 밤 바지 사진 몇 컷을 찍은 후 아쉽지만 봉투에 넣어 폐기처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론 속 시원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새 바지를 산다는 기대감도 들었고요.


거실 소파에 앉아 사진을 보다가 문득 고등학교 때 배운 조침문(弔針文)이란 글이 뇌리에 떠 올랐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여류 수필문학의 하나로 조선후기 유 씨 부인이 쓴, 부러진 바늘을 조문하는 글입니다.

남편이 죽은 후 27년을 함께 했던 바늘을 잃은 슬픔을 애절하게 표현한 글이지요.

유난히 고문, 즉 옛 글 외우기를 학생들에게 강요했던 국어 선생님 덕분에 조침문 전문을 외웠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못다 한 인연을 후세에서 다시 만나 삶과 죽음을 함께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과 감히 비교할 순 없겠지만 긴 세월 동안 내게 만족감을 가져다준 바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마지막 작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빌어 봅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다가 올 겨울에 마음에 드는 바지를 찾을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다시 이십칠 년이면 구십 세가 됩니다.

그때까진 함께 하길 바란다면 그건 과한 욕심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