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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아저씨 Aug 15. 2019

오분 스피치

내가 감사하는 일들...


1980년대에 각종 모임이나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오분 스피치라는 것이 유행했었던 적이 있었다.


오 분 동안 개인 신변이나 본인이 선택한 주제에 대해서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막상 발표를 해보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주어진 시간내에 기, 승, 전, 결에 따라 발표를 마무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하다 보면 당초 생각과는 동떨어진 곳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기도 해서, 듣는 사람들이 실소를 짓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 당시 초, 중, 고등학생 시절에는 각종 웅변대회가 많이 열려서,  웅변 교습학원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발표력이 상당히 중요시되던 시절이었던 만큼 오분 스피치를 통해 발표자사회성과 대중연설 능을 짧게나마 가늠해보자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오분 스피치에서 내가 주로 발표했었던 주제는 “내가 감사하는 세 가지 일들”이었다.


생활을 하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많겠지만 기왕이면 좋은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가 있고, 특히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좋은 일들에 대한 기억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선택했던 주제였다.



내가 감사하는 세 가지,




첫째는 몸성히 태어난 신체에 대한 감사였다.


초등학교 시절 두 번씩이나 신장염으로 인해 수개월 동안 거의 맨밥만 먹고 지내며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2학년과 5학년 때 두 번 겪은 걸로 기억이 나는데, 병의 특성상 저염식으로 소금기가 있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한참 먹고 뛰어 놀 나이에 맨밥을 먹고 지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밤중에 몰래 밥과 반찬을 먹고 나면, 그다음 날 아침 바로 얼굴과 몸이 퉁퉁 붓는 바람에 어머님께 많이 혼나기도 했고, 이뇨작용에 좋다는 익모초 다린 약초물을 하루에 몇 사발씩 마시기도 했다.

 

약초물이 매우 써서 먹기는 싫었지만,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거의 반 강제적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자식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밭두렁이나 산에서 직접 익모초를 캐 오셨던 어머님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편이 먹먹해 지곤 한다.


익모초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잔병치레와 힘든 시간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무탈하고 건강하게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이 부모님이 나에게 주신 첫 번째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고향이 안동이라는 점이다.


누구나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자랑과 추억거리가 많이 있을 것이다.


안동은 시 규모의 도시였지만 교통의 오지(奧地)였고 주변이 낙동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외진 곳이어서, 어릴 때 자연과 더불어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봄이면 산에 올라가서 처음으로 할미꽃 찾기(봄에 처음 핀 할미꽃을 찾으면 늙지 않는 다고 함),


할미꽃


그리고 쑥과 냉이 캐기,

쑥이 많을 경우에는 어머니께서 특별히 쑥떡을 해 주셨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간단한 쑥버무리(쌀가루와 쑥을 버무려서 삼베에 싼 후 가마솥밥에 올려 찐 떡 종류)를 해주셨다.


뒷 산에 올라가서 이웃동네 아이들과의 전쟁놀이와 참호짓기, 


낙동강에서 멱감고 고기잡기,


가을이면 도토리 주워서 묵 만들어 먹기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에서 지급해 주던 무료급식(옥수수가루 빵과 전지분유) 타 먹기 등,

(아이들의 손이 더러워서 깨끗한 손수건을 갖고 오는 학생에게만 빵을 지급하기도 했음)


계절마다 재미있는 놀거리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 이런 추억들을 이야기하면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들은 거의 믿지를 않았다.


그리고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는 나름대로 교육 중심도시로 알려져 있어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마치는데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양반도시"란 이름답게 조금은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면도 있지만, 여전히 별난 고집스러움과 정이 있는 고향 “안동”을 사랑한다.



안동 하회마을 병산서원 전경




셋째는 대학을 서울에서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옛말에,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자식은 한양으로 보내라"


는 말이 있듯이 서울에서 대학공부를 하는 것이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의 소박한 꿈이었다.


고등학교 등굣길에 서울 청량리행 기차가 지나가는 건널목이 있었다.



건널목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할 때면 늘 신호수 아저씨가 딸랑딸랑 경고음을 울리며 건널목을 막아섰고, 그때마다 서울행 기차가 지나가곤 했다.


“나도 언젠가는 꼭 저 기차를 타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올라가야지!!”하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었지만, 그때의 집안 사정을 생각했을 때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학교 성적도 그런대로 괜찮았고 형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에 입학을 했고, 거기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가 있었다.






아직 많은 경험이 없었던 사회 초년생 시기였기에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를 주로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늘 든든한 마음의 언덕이 되어주는 아내와 가족들, 건강하고 밝게 자라 이제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된 딸 그리고 아들, 언제나 부담 없이 소주 한잔에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들, 그리고 나의 주변에 있는 이웃들과 모든 것들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내가 있음으로 세상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로 인해 나의 존재감을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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