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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구 Aug 08. 2018

"혹시, 페미니스트세요?"

"혹시, 페미니스트세요?"

실제로 누군가가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신기한 질문이었다. 저 질문에 대해 "예"라는 대답은 무슨 의미이고 "아니오"라는 대답은 또 무슨 의미인가. 세상에.


하지만 한편으로,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니오."

나는 거의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 뭐가 궁금했던 건지, 뭐를 기대하고 예측했던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대답에 딸려 나온 옅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대답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에도 만족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페미니스트는 명예로운 단어예요.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여성이론 전문가도 아니고 여성운동 참여자도 아니에요. 그런 와중에, 남성으로서 그런 단어를 스스로에게 붙일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저 말을 입으로 꺼내는 순간까지도 딱히 해보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이야기하며 스스로도 조금 놀랐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옳다고 생각하는 말이다. 해당 문제에 대한 이론적 고민도 현실적 참여도 깊게 하지 않고 있는 한 명의 남성으로서 감히 저 단어를 스스로에게 붙일 수 있는 자격이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사회과학 전 영역에 대한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의 영향은 나에게도 분명 상당한 흔적을 남겼겠지만, 그 정도로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세상 누가 무언가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겠는가. "This is what feminist looks like"이라고 쓰인 티셔츠 한 장 사는 것으로 그 자격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닌 거다, 나는.



저 작은 대화는 나에게 꽤나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소개하는, 진지하고 열성적인 한 여성 친구에게 의견을 물었다.

"스스로를 뭐라고 부르는가와 상관없이, 본인이 어느 진영을 택하느냐가 물론 훨씬 더 중요한 문제겠지. 하지만 한편으론,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일반적으로 퍼져있음에도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오히려 남성의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 한 사람이라도 더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면, 세상을 바꿔가는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해."


긴 시간 동안의 고민이 묻어있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부딪혀야 하는 상황들을 겪지도 않으면서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고 싶지 않았고, 남성으로서 '여성들'이 겪는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으스대며 '잠재적 동맹'을 자처하고 싶지도 않았다. 잠재적 가해자라면 모를까 '동맹'이라니, 맙소사. 해당 주제에 대해 이 친구와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처음의 내 생각 -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대답할 수는 없다 - 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내가 지지하고 몸 담고 싶은 진영을 분명히 하기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명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다. 방어적이 될 이유도, 거들먹거릴 이유도 전혀 없는 문제였다. 그저 내 생각을 정확히 이야기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만약 어느 날 다른 누군가가 "페미니스트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오. 그 문제 - 혹은 그 관점에 있어 저는 아직은 아는 것도 없고 하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그저 '정상'적인 한 명의 사람이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여성 차별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조금이라도 옹호한다면, 당신과 맞설 준비는 되어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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