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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원 Jan 04. 2024

원고의 청구를 인용한다.

소송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나는 업무상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꼭 법정 안에서 다소곳하게 앉는 날이 온다. 그렇다고 해서 법조인이나 소송의 당사자는 아니다. 그저 재판의 진행경과와 결과를 알아야 하는 공공기관의 직원에 불과하다. 그런 나의 시각에서 법정의 모습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치열한 법정과는 달리 산업단지에 위치한 차가운 공장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사자들끼리 치열한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질 것 같은 변론기일에는 10분 안쪽으로 이미 제출된 준비서면을 확인하고 차후에 이루어질 내용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룬다. 증인심문이 있는 날에는 제법 드라마에서 보던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는 극존칭은 보기 드물다. 특히나, 판결선고가 있는 날이면 평균적으로 하나의 사건당 선고시간이 30초를 넘지 않는다. 이런 현실적인 법정은 내가 느끼기엔 다분히 기계적인 공간이다.


유례없는 한파가 찾아왔다는 기상예보를 들었던 어느 날, 판결선고를 듣기 위해 법원으로 향했다. 보통 판결선고는 법정이 개정하는 10시나 2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법정이 열리기 전의 복도에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원고와 피고로서 으르렁 거리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물을 떠놓고 기도라도 하듯이 가만히 앉아서 판결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기상청이 틀리지 않아 유난히도 추웠던 그날, 입김이 새어 나오는 법원의 복도엔 유독 대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이윽고 법정 앞 개정을 알리는 등에 불빛이 들어오고 삼삼오오 법정 안으로 들어간다. 법정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숨죽이며 앉아있게 된다. 재판이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옆사람과 대화를 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모두들 작은 소리도 내지 않으며 판사님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법정 안의 사람들은 경위분의 말에 기립하고 판사님들이 입장하시면 판사님과 가벼운 목례 후에 자리에 앉아 판결선고를 경청한다.


판결선고는 사건별로 판결주문만을 읽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 짧은 시간 내에 소송당사자들의 희로애락을 볼 수 있는 은근히 재미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선고는 사건번호 순서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보통의 나는 "패소하면 회사에 이걸 어떻게 보고하지?"라는 생각을 하며 순서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날은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의 떨리는 몸을 보며 어떤 일로 법원까지 오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자연스레하며 그들의 순서를 함께 기다렸다. 때마침 학생들이 당사자인 소송의 사건번호가 낭독되고 재판장 판사님으로부터 판결주문이 읽힌다.


"피고는 원고에게 ?,000,0000원을 지급하라. 소송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는 판결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앳되어 보이던 학생들은 환호를 지르려다가도 판사님들과 경위분의 눈치가 보였는지 내뱉고 싶어 하는 소리를 꾹 참고 법정밖으로 나간다. 아무래도 사건명과 판결주문을 보았을 땐 악덕사업주에게 밀린 임금을 받아내는 판결을 받은 듯하다.


나는 그 앳되어 보이는 학생들의 사건에 대해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나중에 항소심이나 상고심에서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환호성을 꾹 참아내던 그들의 모습들은 진심이었다. 학생들보다 아주 조금 더 사회를 경험하고 법원과 친숙한 나의 추측으로는 판결을 승소했다고 해서 곧바로 밀린 임금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고, 오늘의 판결을 가지고 법원과 또 다른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 시간들은 오늘 겪었던 추위처럼 매섭고 사나울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오늘 그 학생들이 법정 안에서 환호를 지를 뻔했던 그 순간을 잊지 말고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행히도 오늘의 법정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꽤나 따스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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