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발놈인 법무담당자의 이야기
"C발 너 T야?"의 소리를 매일매일 듣는 나는 J까지 합쳐진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확신의 T발놈이다. 그런 생명체가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 공공기관에서 법무 담당자가 되었으니 어울리면서도 피곤한게 사실이다. 내가 근무 중인 기관은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런 기관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공기관이라고 하면 한국전력공사나 한국철도공사(코레일)과 같은 큰 공기업만을 떠올리지만, 이러한 메이저 기관은 전체 공공기관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기획재정부에서 운영 중인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ALIO)에 따르면 2023년 9월 말 기준으로 중앙정부에서 출연한 공공기관에 재직 중인 근로자는 347개 기관 413,600명이다. 이러한 공공기관은 크게 공기업, 준정부기관, 기타 공공기관으로 분류되며 공기업은 시장형과 준시장형으로 준정부기관은 기금관리형과 위탁집행형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지방자치단체에서 출연해 만든 지방 공공기관을 합친다면 어림잡아도 대한민국의 국군보다도 더 많은 인원이 공공기관에서 근무 중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내가 근무 중인 기관은 위에서 설명한 분류 가운데에서도 기타 공공기관에 속해있다. 200명 미만의 소규모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소송이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법률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무담당자의 업무는 공기업이나 준정부기관과 다르지 않다. 기관에서 유일한 법무 담당자로 5년째 근무하다 보니 사람에 치이는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기관의 이름을 포털에 검색하며 밤사이 부정적인 이슈가 없었는지를 확인하고 긴장하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근무를 시작한다.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사람이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시선을 깨우치게 되었다.
계약서 등 서류를 검토하거나 소송을 위한 서면을 준비할 때는 '혹시나' 이 내용이 빠지지 않았을까? '혹시나' 이 내용이 들어가면 더욱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회의에 참석해서는 다른 참석자들과 다르게 '만약에' 이러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라는 내용이나 '만약에' 상대방 측에서 이러한 주장을 해오면 우리는 이렇게 주장해야 한다는 어쩌면 다가오지 않을 수 있는 미래를 대비하거나 예측지 못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곧바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도록 플랜 A, B, C를 마련한다.
법무 담당자로서 본의 아니게 쌓여버린 내공은 나의 일상에도 고스란히 접어들었고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더라도 '혹시나'. '만약에'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T나 J인 사람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지만, 아닌 사람들은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살아가나?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변을 해본다면 화재를 예방하듯이 좋지 않은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일 것이고, '혹시나', '만약에'를 달고 사는 건 공공기관의 법무 담당자의 본능일 것이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에 다니는 나로서는 세금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이지 않게 하는 것이 납세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도 내가 낸 세금이 쓸데없는 소송의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지출되고, 또 패소하여 배상까지 해주어야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내가 이러려고 세금을 냈나?"라고 한탄할 게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내일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