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조금만 더 무모해질게요

유럽에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by 이모리

어렸을 때 나는 몸이 약했고, 학교에서도 별로 존재감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까지는 공부도 그냥저냥 중간 정도 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얼굴이 빼어나게 예쁘지도 않았고 끼도 없었다. 반에 꼭 그런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또래들보다 키도 크고, 하는 행동도 어른스럽고, 똑똑해서 선생님들 눈에도 잘 띄고, 반장이나 임원으로 뽑히는 아이들. 수련회나 소풍을 가면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장기를 자신 있게 내비치는 아이들. 난 그런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그 아이가 리더가 되는 무리에 조금이라도 속한 것 같으면 그게 그렇게 행복했고, 그 아이와 팔짱을 끼고 걸었던 날은 마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마냥 걸음까지 당당해졌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댄 순간이 있었을까. 그 아이와 무리에 있는 아이들이 내가 잘난 척을 한다며 따돌림을 하기 시작했고, 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엄마에게 털어놓으면서 급기야 엄마들 간의 고성이 오가는 어른 싸움으로 번졌다.


조금은 괴로웠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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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공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형편에 닿는 대로 학습지나 피아노 등 이것저것 시켜주셔서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중간에서 조금 위 정도였으니 아주 애매했다. 아주 잘하거나 아니면 아주 못 해야 눈에 띄는데 말이다. 내가 학교에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게 된 두 가지 계기가 있다. 글쓰기를 곧 잘해서 백일장에 나가곤 했었는데 어떤 백일장의 시상식이 끝나고 금은동을 받은 우리를 교감선생님이 다른 선생님에게 소개하며 “얘는 30만 원, 얘는 20만 원, 얘는 10만 원” 상금으로 칭하던 그날, 나는 20만 원이었다. 굴욕적이었다.


또 하나는 전교 1등과 절친이 된 것이었다. 그 아이와 가까이 붙어 다니면서 공부를 잘하면 얼마나 학교 생활이 편한지, 선생님들의 태도가 바뀌는지를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서 봤다. 그렇게 내 속에 자라고 있던 분노와 질투는 공부를 잘해서 내 ‘존재감’을, 내 ‘쓸모'를 꼭 입증해 보이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목표로 변해갔다. 그렇게 중3부터 고3까지 오로지 ‘공부'만 생각했다. 성공하고 싶었고, 내가 복수하고 싶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작아지게 만들고 싶었다. 내 마음속 분노의 우물이 점점 차오르는 또 다른 근원은 우리 집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이어진 부모님의 불화는 점점 더 심해졌다. 야속하게도 그 기억들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서로를 증오로 바라보는 눈빛, 상대방을 죽이는 칼 같은 말들. 끊임없는 눈물과 피가 철철 흐르는 마음의 상처들. 물론 아픈 기억들이지만 지금 그 기억들이 떠오른다고 해서 나의 삶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20대까지만 해도 힘들었었는데 나이를 먹으니 그 정도의 맷집은 생겼나 보다.


학교에선 철저히 모범생의 가면을 쓰고, 혼자 있을 때는 어두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내가 정말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잠이 들지 못했던 날에는 내가 아는 세상 모든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했다. 대학 입학식 전에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야 했는데 그 전날까지도 부모님은 이혼 직전의 상황이었다. 대체 서울에 올라가 대학에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허무한 마음이 자꾸만 들었는데 엄마를 생각하며 겨우 마음을 잡고 또 다잡아 서울행 버스를 탔다. 점점 멀어지는 엄마의 얼굴이 아예 보이지 않을 때쯤 눈물이 가득 고여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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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의 어느 군, 읍단위에서 태어나 20년을 살다 만나게 된 서울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중고등학교 때와 전혀 다른 자유로운 대학 생활, 전국 각지에서 온 친구들... 내가 얼마나 좁은 시각으로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인생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외부에서 찾지 않고 나의 인생을 내가 주체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그리 강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어려운 상황이 오면 멘탈이 쉽게 부스러지고 회복이 느렸다. 하고 싶은 것을 분명히 알고 실행에 옮기는 편이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지혜롭게 계산하기보다 무조건 질러버리는 편이어서 주변 사람을 참 힘들게 했다. 대학에 진학한 후 부모님과 오빠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안기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어학원 코스가 끝나고 한국행 비행기의 날짜가 점점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그럼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히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법이 없진 않았다. 어학원 6개월 코스를 최대 세 번까지 연장하며 비자를 받을 수 있어서 비용이 높지 않은 어학원을 골라 8개월의 비자를 다시 받는 방법이 있었다. 학생비자로 아르바이트까지 할 수 있으니 일만 구하면 어떻게든 버티며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긴 했지만 또 다른 8개월 동안 제자리에서 계속 머무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Nick도 내가 한국행 비행기 티켓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그도 나에게 한국으로 가지 말라던가, 더블린에서 무엇인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얘기하진 않았다. 우리 안에서 가장 나누고 싶지 않은 주제였지만 그렇다고 피하는 것이 상책은 아니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직장을 구하고, 언제 더블린에 있었냐는 듯 또 열심히 바쁘게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더블린에서 이거는 꼭 해보고 올걸.'이라는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게 가장 컸다. 마침 유학 사업을 하시는 아는 분의 도움으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 2년의 비자를 받을 수 있고, 취업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고, 적어도 어학원에서보다는 대학원에서의 공부가 나를 더 발전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엘츠 시험을 치렀고, 필요한 서류(지원동기, 학업계획서, CV, 추천서 등)를 부리나케 준비해 오퍼를 받았다. 그리고는 결혼 자금으로 모아둔 돈을 깨서 한 학기 학비를 내버렸다. 부모님이 이런 나를 보시면 뭐라고 생각하실까. 좀 두려웠다. 어학연수 끝나는 대로 내가 한국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부모님의 뒤통수를 또 치고 만 것이다. 예상대로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지금도 그 시간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일찍부터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면서 차곡차곡 돈을 모아 여유롭게 사는 것도 좋지만, 얼른 결혼해서 자녀 다 키워 놓고 여유롭게 노후를 보내는 것도 좋지만. 그때 나는 서른둘이었다. 조금 더 젊을 때, 조금 더 해볼 수 있을 것 같을 때 무모해져 보면 안 될까라는 생각은 사실 내 본능에 가까웠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 시간 늘 내 옆에 있던 Nick은 내가 한국에 가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그 선택으로 내가 지게 될 무게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나에게 종용한 적도, 슬쩍 흘리듯 조언을 한 적도 없었다. 결국 그 선택은 오로지 내 마음의 소리에서 비롯됐다.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유럽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한국에 가야 하는 날이 언젠가 오더라도 여기에서 해볼 수 있는데 까지 해보리라.


그렇게 내 한국행 비행기 티켓은 날아갔고,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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