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생애 처음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아일랜드에서.

by 이모리

살면서 앰뷸런스를 타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나에게도 그런 날이 와버렸다. 그것도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에 오자 마자 가장 바랐던 것 중 하나는 제발 아프지 않고 건강해서 병원에 갈 일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이 없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병원비가 많이 나올 것이 두려웠다. 유럽의 의료시스템이 한국 의료 시스템보다 더 체계적으로 잘 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애초에 없었고 , 왕왕 주위에서 들리는 얘기로는 응급실에 가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고, 치료를 받더라도 (물론 치료받는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백 유로, 이 백 유로가 기본으로 나온 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백 유로는 물론 오십 유로, 이십 유로도 얼마나 크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1시간 이내의 거리는 웬만하면 걸어 다녔던 나에게 있어서 병원비가 그렇게 크게 깨진 다는 것은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뜻대로 되던가. 결국엔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약국에 가서 약을 사서 먹었는데 도통 들지 않았다. 이렇게 버티다가는 낫지도 않고, 나중에 더 큰 고생을 할 것 같아서 동네 GP에 갔다. 아일랜드에서 GP(General Practitioner)는 동네마다 있는 가정의학과 같은 개념이다. GP에서 기본 진료를 받고 난 후에도 차도가 없으면 의사가 큰 병원에 추천서를 보낸다. 이 추천서가 있으면 조금 더 빨리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다행히 처음 아팠을 때 큰 병원까지는 가지 않아도 됐고, GP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회복이 되었다.


아플 때 경험하는 또 다른 애로사항은 나의 증상을 의사에게 설명하고, 의사가 나에게 처방을 내리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질병의 이름도 그렇고, 우리 몸의 장기도 그렇고 내가 의학을 공부했거나 의학에 관심 있어서 의학 드라마를 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병원에 가기 전 사전을 찾아보면서 어떻게 내 증상을 설명해야 할지 미리 준비를 할 수는 있어도 진료 중에 의사가 나의 증상에 대해 얘기할 때 어떤 의학 용어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혼자 가지만 처음 몇 번은 남편과 같이 갔었다. 진료 중 의사가 하는 질문이나 증상, 처방에 대한 내용을 내가 다 이해하지 못했을 때 남편이 중간에서 도와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내가 만났던 의사 선생님들은 다 좋은 분이었다. 내 모국어로 진료를 받는 것만큼 마음이 편하지 않고, 아픈 몸을 이끌고 영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있어 늘 피하고 싶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내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또박또박 얘기해 주시고, 여러 번 질문해도 친절하게 답해주셨던 의사 선생님들을 만났던 것은 참 다행이었다. 이런 것들이 이방인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한 번씩 진료를 받을 때마다 50유로(지금은 60유로)를 냈는데 보험이 적용되면 환급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나라 진료비와 비교했을 때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 약값까지 해서 70유로 정도가 통장에서 한 번에 빠져나가면 몸도 몸이지만 마음도 쑥쑥 아린다. 몇 유로 버스비 아낀다고 웬만하면 걸어 다니고, 가끔 한 번씩 한식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하고 싶었던 것도 정말 겨우 꾹 참았던 것들이 뭔가 싶고 허무한 마음까지 든다. 몸이 아픈 것이야 말로 이런 노력들처럼 내가 통제하고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아플 때에야 비로소 쉬어가고 멈추어 가게 된다. 몸에 좋은 음식이 무엇인지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게 되고 챙겨 먹게 된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잊고, 앞만 보며 살다가 다시 정신 차리게 된다.


그런데 동네에 있는 GP에 가서 진료를 받고 회복할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정말 다행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어느 날, 무슨 음식을 잘못 먹었는지 장염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열도 계속 나고 화장실을 수십 번 들락날락거렸다. 남편이 약국에서 사 온 약을 먹고 좀 차도가 있나 싶었는데 몇 시간이 지나서 극심한 복통이 시작됐다. 30여 년 인생에서 경험해본 것 중 가장 고통스러운 복통이었다. 온몸의 장기가 꼬이고 비틀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결국 바닥을 뒹굴고야 말았다. 속이 너무 매스꺼워 금방이라도 토를 할 것 같았지만 막상 하려면 나오지 않았다. 식은땀이 계속 나고 눈앞이 하얘졌다. 이런 나를 보며 놀란 남편은 바로 앰뷸런스를 불렀다. 그렇게 생애 처음으로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 응급실을 가게 됐다.






응급실에만 도착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앰뷸런스에 실려왔으니 바로 의사를 만나 진료를 받고, 약을 먹고, 병실에서 좀 쉬다가 집에 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의사를 만날 때까지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채로 응급실 복도에서 대기해야 했다. 통증이 계속 심했고, 그 와중에 수시로 화장실도 왔다 갔다 해야 했는데 남편이 옆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나를 부축하고 화장실 안까지 같이 갔다. 나 혼자 움직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렇게 아픈 환자가 있는데 대체 의사는 어디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는지. 화가 나면서도 통증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곧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중간중간 간호사가 와서 체온을 재고 진통제 몇 알을 주었는데 그 진통제도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침대에 누워있는 채로 X-레이실로 옮겨져 촬영을 하기도 했다.


7-8시간을 기다린 끝에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의사는 입원이 필요할 거라고 했으며, 병실로 옮겨질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내 옆을 지키고 있는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둘 다 그 밤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집을 떠나 병원에 온 지 12시간이 넘었을 때, 한밤을 꼴딱 넘기고 새벽 동이 트기 시작했을 때 1인 병실로 옮겨졌다. 그제야 함께 밤을 새운 남편에게도 집에 다녀올 시간이 주어졌다.


검사 결과 특정한 세균이 일으키는 장염이었고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며칠 더 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 전 주에 먹었던 초밥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하긴 했지만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데 의사가 항생제 처방을 해주지 않아서 물어보니 계속 대변으로 배출을 하면서 균이 약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탈수 방지를 위해 수액을 계속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거의 체념했다. 제대로 된 끼니를 먹을 수도 없어 물만 마시며 시간을 보냈는데 힘이 없으니 누워있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통증에 깼다. 날짜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조금 정신이 돌아오면 유튜브로 먹방을 보았다. 그땐 그렇게 김치찜이 먹고 싶어서 김치찜 먹방만 골라봤다. 나에게 신기루와도 같은 김치찜을 바라보며 아픈 와중에도 침은 고이고, 배도 고파지는 걸 보니 그래도 내가살아있구나 싶었다.


회복이 되고 있는 것이 맞는 지 의심이 들었다가 그래도 병원에 있으니 나아지고 있는 거라는 희망도 가졌다가 그렇게 마음의 곡예가 계속되던 중 신기하게 4일째 아침부터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고, 설사와 통증이 멈추었다. 오늘 집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의사가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한바탕 큰 일을 치렀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내 몸이 아프면 나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도 함께 고생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같은 해 겨울에는 공교롭게도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다.


독하게 걸린 감기가 폐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남편은 며칠 동안 밤낮없이 계속 기침을하며,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GP의 추천을 받아 병원에 갔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가야 했다. 나는 앰뷸런스에 실려가기라도 했으니 그나마 병실을 배정받는 순번이 빨리 왔던 것이고, 두 발로 병원에 간 남편이 의사를 만나고 병실을 배정받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응급실 대기 의자에서 한번 더 함께 밤을 새웠다.


타국에 나와 살며 내가 아프거나 내 배우자가 아프면 속도 참 아프다. 하지만 과정이 불편하고 힘들기는 했어도 어쨌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처음에 아일랜드에 와서 나의 경험, 기대와 부딪히는 모든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불평의 패턴은 '한국이었으면 진작 해결됐을 텐데 여기는 왜 이 모양이야...'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불평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평하면 불평할수록 계속 불평할 것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실은 끝이 있는 터널인데 끝이 없는 것처럼, 빛이 보이는 터널의 끝을 향해 두 발로 걸어 나아가는 정도의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터널 안을 맴돌며, 끝이 보이지 않는다며 불평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한 해의 중간에, 그리고 크리스마스 직전에 크게 한 번씩 아팠으니 한동안은 아플 일이 없으려나 하는 이상한 기대감도 올라왔다.


삶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지만 또 그렇게 지나간다.


지나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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