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한번 살아보고 싶어졌어

by 이모리

그렇게 비행기를 끊었고, 그다음 해에 정말로 유럽에 갔다. 반 고흐 미술관이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친구가 살고 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그 사이에 여행할 국가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중 고민하다 프랑스 파리를 택했다.


2월의 유럽 여행. 10여 일 중 쨍한 햇빛을 본 것은 몇 시간도 채 안됐다. (이때는 몰랐다. 이런 유럽 날씨가 훗날 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여행이니 주로 밖에 돌아다니는 일정이 대부분인데 어찌나 칼바람이 불고 춥던지. 바닥 난방을 하지 않는 유럽은 실내에서도 따뜻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유럽의 으슬으슬하고 시린 추위를 제대로 경험한 여행이었지만 어쨌든 나의 상상이 현실이 됐다.


혼자 한국과 아주 먼 곳에 동떨어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두려움과 흥분이 감돌았다. 그토록 바라던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과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반 고흐의 그림을 정말 원 없이 보았다.


네덜란드 반 고흐 미술관에서 드디어 '그'를 만나다


바토무슈를 타고 아름다운 파리의 야경을 보면서는 ‘그래서 사람들이 파리, 파리하는구나.’하며 하나라도 놓칠까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파리하면 또 에펠탑 아닌가. 관광객들로 이미 북적이는 샤요 궁에 가서는 사람들 사이를 겨우 비집고 들어가 에펠탑을 배경으로 셀피를 남겼다. 밤에는 반짝이는 조명으로 더욱 화려 해지는 에펠탑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는 감격과 환희도 잠시,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지 모르는 나의 이 소중한 시간 동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날 낮에 갔던 루브르 박물관이 떠올랐다. 문 닫은 시간이 훌쩍 지났으니 왠지 그곳에 가면 될 것 같았다. 매섭게 시린 겨울바람에 덜덜 떨리는 밤이었는데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개선문으로 가서 튈르리 정원을 가로질렀다. 튈르리 정원에 운영시간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냥 걷고 있었는데 멀리서 경비원 아저씨의 손짓을 보고 황급하게 큰길로 다시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도착한 루브르 박물관. 낮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없어 조용한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황홀했다. 착각이겠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곳을 밤에 다시 온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관광객들로 늘 북적이는 낮의 '루브르'
내가 사랑한,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밤의 '루브르'


스물아홉을 지나 그토록 원했던 30대의 초입에 서 있던 나. 언제 아물까 싶던 사랑에 대한 상처도 잔흔 정도만 남아 있었고, ‘지난했던 20대도 끝났으니 이제 나도 꽤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괜찮은 인생인데?’라고 반문하던 시간이었다. 당연히 나 스스로 답을 내릴 수도 없었고, 그 짧은 여행이 답을 줄 수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후 달라진 것은 분명 있었다. 이전에 한 번도 혼자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나도 혼자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 것 아닐 수 있겠 지만 나 스스로 이 사실이 꽤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또 하나는 인생에서 약간은 더 무모해져도 괜찮다는 여지가 생긴 것이었다. 20대를 돌아봐도 무모했던 순간들이 없진 않았기에 30대부터는 인생 곡선을 좀 순탄하게 그려 보자 싶었건만 그렇게 쉽게 타협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속의 꿈틀거림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행 이후 하나의 세포가 내 마음에 생겨나서는 분열을 거듭하여 누를 수도 감출 수도 죽일 수도 없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자라나고 말았다.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시간이 29년인데 그 땅을 밟았고, 보았고, 이제는 그 속에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살아보고 싶어졌다. 그때만 해도 욕심, 객기, 헛바람, 역마살 뭐 어떤 단어를 붙여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의 핵심은 밤 사이에 꾼 꿈이 아침에 깨자마자 부랴부랴 도망가듯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것과 달리 꽤 현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이후 1년 7개월,


난 그렇게 유럽에 다시 가게 됐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1. 아마도 곧 갈 것 같아, 유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