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아일랜드의 밤공기는 참 차가웠다. 공항 밖을 나오니 이미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30분 정도를 달려 홈스테이에 도착했고, 반갑게 맞아주시는 홈맘, 홈파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얼른 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집과 내가 쓰게 될 방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받고, 홈맘이 잘 쉬라고 방문을 닫고 나가시는 순간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동시에 물처럼 피로가 쏟아졌다. 마치 홍수가 집을 덮치고, 내 방 문 앞까지 들어오려는 걸 막아보려 버티고 버티다 결국 물의 힘을 이기지 못해 내가 삼켜지는 것처럼.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 저 밑바닥에 있는 에너지까지 다 끌어다 썼으니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첫날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이 되어 눈을 잠깐 떴지만 다시 잠들어버렸고, 정오를 지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이틀 후에 시작되는 6개월 영어 코스를 앞두고 딱히 준비할 것은 없었지만 학원 위치라도 미리 알아둬야겠다 싶어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 더블린은 거리에 따라 버스 요금이 계산되는데 동전이 조금 부족해서 내려야 하나 하던 차에 버스 기자 아저씨가 그냥 타라고 해주셨다. 블로그를 통해 충분히 숙지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실전은 배로 어려웠다. 혼자였기에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멋쩍음과 당황스러움을 같이 나누고 털어낼 사람도 없어서 버스를 타고서도 한동안 머쓱했다.
이 버스는 학원 앞을 지나 시내를 통과하는 버스였다. 더블린에서 시내라고 하면 트리니티 대학, 그라프톤 스트릿, 오코넬 스트릿, 스파이어 정도인데 이곳들이 모여있어서 더블린의 시내버스는 웬만하면 다 이곳을 통과한다. 홈스테이가 있는 곳은 더블린 18의 주택가로 매우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집들은 많은데 그 안에 사람이 살기는 사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역시나 시내로 가까워질수록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로 북적이고 풍경과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일랜드는 영어를 쓰는 나라이기 때문에 인근 유럽 국가에서도 영어를 배우거나 직장을 구하러 많이 온다. 또 학생비자로 영어 공부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어서 남미나 아시아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코넬 스트릿을 걸으며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아무래도 나와 같은 외국인들이 눈에 더 들어왔다. 저 사람들은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더블린에 왔을까.’, ‘바라던 것은 이루었을까?’, ‘그래서 지금은 행복할까?’등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해 질 녘 오후의 찬 공기가 쑥 들어왔다.
며칠 전 만해도 난 한국에 있었고, 고향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추석을 보냈다. 9월의 한국은 아직 더웠다. 그래도 여름의 후덥함이 느껴지는 건 아주 잠깐이었고, 오후가 되면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서 엄마와 산책을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보름달을 보며 엄마와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서로가 그리우면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이 달을 보자고 약속했다. 한국에서도 아일랜드에서도 동일하게 뜰 이 달을. 그리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와 엄마와 함께 보던 달을 혼자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외로움이 밀려왔는지 모르겠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그리고 그토록 바라 왔던 것을 이룬 것인데도 한없이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내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한 명 한 명 떠올랐다.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당연한 것은 없었다.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조금 더 배려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며 애썼던 흔적들이 가득했다. 이렇게 뒤늦게서야 그리고 떨어져서야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고마움이 가득 차올랐다.
인터넷 기술이 발달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메시지를 보내고, 영상 통화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는 있겠지만 아직 하나쯤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있는 것처럼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늘 남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동안은 아련하고 애틋하며,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없음에 슬퍼질 때도 더러 있을 거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2,139일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