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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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민성대장증후군. 이 병을 기억하는 이유는 현아 때문이다. 원더걸스를 탈퇴할 때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인해 활동불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원더걸스의 빠돌이었던 나는 덕분에 웬만하면 듣도 보도 못했을 질병 이름을, 원더걸스가 해체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세균의 균형이 깨진 것도 원인 중 하나란다. 우리의 대장에는 1백조 개, 그러니까 약 1kg이나 되는 여러 세균이 각자의 비율을 지키면서 균형을 맞춰 살고 있다.
그런데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모종의 이유로 이 비율이 깨지면 대장이 고장난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은 그 결과 중 하나. 세균의 균형이 깨지면 소화시킬 때 유독물질이 나오는데, 이 물질이 장을 망가뜨리고 나아가 뇌까지 망가뜨려서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키운다.
즉, 다양한 세균의 균형이 무너지면 장도 망가지고, 뇌도 망가지고, 심리도 망가지고, 사회가 망가지는 그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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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찮게, 한 동성애자 대위가 구속되었다는 기사를 봤다. 직업군인이라 소속도 분명하고, 주거도 일정해서 도주우려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구속되었다.
찾아보니, 군형법에 따르면 동성 군인 사이의 성관계는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였다. 합의는 중요하지 않다. 그 대위는 합의 하에 성관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속까지 됐다. 군대는 그런 곳이었다. 개인이 합의한 성관계를,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까지 망가지는 곳.
더 찾아보니,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선언했던 이정미 재판관은 “동성애 처벌조항에 대해 기타추행은 군이라는 공동사회의 건전한 생활과 군기의 확립을 목적으로 한다”는 합헌 의견을 냈더라.
친구의 애스크드에 들어갔다가, 동성애에 찬성하지 못하겠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보았다. 나는 그 사람의 연애에 찬성한 적이 없다. 그 사람의 연애에 내 찬성이 필요하지 않듯이, 남성이 남성을 사랑하는 데에도 타인의 찬성은 필요없다. 이 쉬운 말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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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류사회. 우연찮게 떠오른 단어. 특정 균과 무생물들을 전부 없애, 순수한 무언가만을 남기려는 사회. 그 사회가 한국 사회다.
한국 사회의 균들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론 성소수자가 있다. 항문성교를 하는 더러운 성소수자라며 그들의 인권은 배제된다. 둘째로는 많고 많은 피해자들이다. 세월호 유가족, 구의역 김군, 많은 성범죄 피해자들 등등 그들은 순수하지 않고 더렵기 때문에 사회에서 증발된다.
그렇게, 수많은 약자의 인권을 억누르고, 그 사람들의 존재를 부정하며 남은 사회는 무엇일까?
인위적으로 다양성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다양성은 우리의 곁에 있다. 나와 너의 얼굴의 꼴이 다르듯이, 우리를 이루는 피부색과 성적 지향, 바라는 가치관은 다르다. 그저 이 다름을 인정하자는 이야기다. 다름을 배제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해서 합의하에 이루어진 관계도 처벌하는 사회를 바꾸자는 거다.
모든 순수하지 않은 것들을, 제도권이 가르쳐주지 않고 말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배제한 사회엔 뭐가 남을까? 그 증류사회에 당신은 남아있을 것 같은가? 뭘 근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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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삶이 서로 균형을 맞춰 나가는 사회가 건강하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이미 다양한 삶을 꾸리고 있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수많은 필부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 삶을 이 사회에 구현시키자는 말이다.
없다고 생각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존재가 지워지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당신의 존재가 지워지지도 않는다. 이 좆같은 증류사회를 바꾸자는 이야기는, 당신의 존재를 지우자는 게 아니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하자는 뜻이다. 당신의 호의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온정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지향에 관계없이 같은 사람이면 사람으로 인정하자는 거다.
이 말이 그리 어렵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