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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Aug 04. 2017

카페와 패스트푸드.

카페를 좋아한다. 안암 오거리 지나면 보이는 커피브레이크도 좋고, 길동역 2번 출구 할리스 커피도 좋고 명일역 1번 출구 거북이 달린다도 좋다. 커피브레이크는 다양한 원두로 더치 커피를 뽑는다. 길동역 할리스는 총 2층짜리 건물인데, 2층 창가석을 좋아한다. 거북이 달린다의 창가자리도 좋다.


창가자리를 좋아한다. 혼자 카페에 자주 가는데, 혼자에 집중할 수 있다. 일이 있으면 일에 집중할 수 있고, 영화를 보면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 때로 햇빛이 세서 눈이 부시면, 그 햇빛 그대로를 즐기면 된다. 창가에 앉은 사람들은 혼자 와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같이 있지만 함께하지 않는다. 같이, 각자 일한다. 집단적이며 개별적이다. 팔 하나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스스로의 우주에 있다.  


소파자리도 매력있다. 내 왼쪽 사람은 공부를 하고 있고, 오른쪽 일행은 각자의 연애에 대해 논한다. 맞은편 남자는 핸드폰으로 게임을 보는 듯하다. 그 남자의 왼쪽엔 영어 회화를 공부하는 일행이 있다. 타인과 함께 있다는 사회적 감각을 느끼기엔 소파자리가 좋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볼 수 있다. 회화를 하며 웃는 분의 표정, 공부를 하며 찡그리는 표정, 각자의 연인의 뒷담화를 까며 서로에게 공감하는 추임새까지 다양한 행위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카페는 특이한 공간이다. 집단적이지만 가장 개별적이다. 카페에 있으면 묘한 동질감이 든다.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러 오는데 내 또래의 젊은 분들이 고된 표정으로 각자의 책을 들고 온다. 공부하러 무슨 카페에 가냐? 라는 물음보단 카페에서'도' 공부를 해야 하냐? 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누구는 토익을, 누구는 공무원 시험책을, 누구는 회계 책을 들고 있다. 활자와 싸우고 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적어도 나는 "나만 이렇게 아둥바둥대는 게 아니구나"라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카페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가는 곳은 아니다. 카페는 우리가 서로의 시간을 혼자 혹은 누군가와 함께 보내기 위해 가는 공간이다. 취준에 지친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위해서, 스터디를 위해, 연인을 만나기 위해 간다. 심지어 과외하러도 간다. 서울엔 분명히 녹지가 많지만 그것도 일부의 이야기다. 카페는 공원이자, 벤치이자, 미술관이다.


최근 선릉 근처에 자주 갔다. 선릉엔 카페도 많고, 패스트푸드도 많다. 전엔 종로에도 자주 갔다. 종로에도 카페가 많고 패스트푸드도 많다. 묘한 점은, 카페엔 젊은 사람이 많고 패스트푸드점엔 노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 롯데리아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노인들밖에 없었다. 무인POS기로 인한 디지털 격차로 노인들이 소외된다는 기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선릉 근처에 노인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한국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우리는 시간에 쫓긴다. 패스트푸드점은 시간에 쫓기는 젊은 직장인을 위한 공간인데, 그 공간에는 정작 노인밖에 없었다. 맥도날드나 롯데리아나 광고 바꿀 시간이다. 묘했다. '빠름'을 지향하는 곳에 빠름과 어울리지 않는 노인들이 많다니.


생각해보면 패스트푸드는 머뭄이 아니라 지나침을 위한 곳이다. 포장을 하거나 후딱 먹고 '가기' 위한 곳이다. 모두가 빠르게 지나치는 곳에 노인들은 머문다. 젊은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불편한 걸까. 패스트푸드 가게는 넓기 때문에 카페보단 덜 신경쓰일 거다.


근데 웃긴 점은 패스트푸드는 근본적으로 고객이 빠르게 먹고 떠나길 바란다 공간이라는 점이다. 보내기 위해 디자인된 공간에 머무는 노인들이라. 항상 젊음과 빠름 그리고 새로움을 바라는 사회에 대한 나름의 저항일까.

이렇게 써놓고보니 위선이다. 할리스커피와 커피브레이크 그리고 거북이 달린다에 노인들이 앉아있으면 난 과연 어땠을까? 딱히 좋아하진 않았을 거다. 사람을 좋아해야 하고 항상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좋은 순간은 오래 되고, 나쁜 순간은 짧길 바라는 내 간사함처럼 노인들과 함께 카페를 쓰는 거에 분명히 거부감이 들 것이다.


한국 사회는 보내는 과정에 대한 배움이 부족하다. 과거와 오래된 것은 항상 없애야 할 무언가였다. 개발독재정권이 그러했고, YS 이후 정권도 비슷했다. 오래된 것과 과거는 뒤엎고, 새로운 무언가로 대체하려 했다. 하지만 새로운 것도 곧 오래된 것이 됐다. 무언가로 꽉 차거나 아무 것도 없는 진공. 극단적이다. 어제 오늘 내가 본 패스트푸드와 카페의 풍경과 같다. 젊은이로 가득찬 카페와 노인들로 가득찬 패스트푸드.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쉬이 버리지 못한다. 말로는 쉽게 하지만, 실상 쉽게 버리지 못한다. 감정, 습관, 물건 가리지 않고 말이다. 가슴 한 켠에는 오래된 후회가 있고, 방 한 구석에는 고등학교 동아리 때 받은 생일축하편지가 있고,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에 아빠한테 받은 필름카메라가 있다. 중학교 때 산 노스페이스 티셔츠는 덤이다.


새로 무언가를 배우는 것만큼이나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 카페를 좋아하기 전에 난 어디를 좋아했을까. 아마 PC방이었을 거다. 지갑 하나 들고 집에 나오면 PC방을 가던 게 2002년이고, 카페에 가는 게 2017년이다. 2013년부터 카페에 자주 갔으니, 약 10년만에 바뀐 셈이다. 10년 뒤의 나는 어떤 공간을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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