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이 되어야 정상을 말하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대학원에서 주는 논문, 매일 치뤄지는 리그 오브 레전드 리그, 즐겨찾기 해둔 스트리머 방송만 봐도 하루가 금방 간다. 좀비가 나오는 드라마나, 중세를 배경으로 용이 불을 뿜는 드라마는 그래도 볼만하다. 연출에 감탄하고, 그 연출을 가능케 한 미국 자본에 감탄한다.
한국 드라마는 더더욱 보지 않는다. 전문직 이야기를 가장한 러브스토리가 지겹다. 천 년 먹은 도깨비도 연애, 응급실 의사도 연애, 기자도 연애, 검사도 연애한다. 그래, 사실 연애 소설은 데카메론 때부터 우리와 함께 했다. 그래도 너무하다. 다 된 이야기에 남녀상열지사를 끼얹어 망치는 건 한국 드라마의 유구한 역사다.
이런 내가 치인 드라마가 있다. 바로 <비밀의 숲>이다. 워낙 유명한 드라마라 스토리를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혹시나 안 보셨을 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간단하게 적는다. 어릴 적 수술로 인해 감정을 잃은 검사가 검거한 용의자가 감옥에서 억울하다며 자살한다. 알고 보니 얽히고 섥힌 게 많고, 이걸 설계한 뿌리를 찾는 게 드라마의 요지다.
신의 선물 14일 이후 오랜만에 TV에 복귀한 조승우다. 브라운관이라는 단어를 쓰려다가 요즘 브라운관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TV라는 단어도 바꿔야 할까 싶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비밀의 숲을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봤기 때문이다. 여튼, 연기가 쩐다. 가끔 씩 웃을 때 치인다. 보조개...형...승우형...사랑해...
미국 드라마에 나오던 배두나도 쩐다. 생활형 연기라고 해야 할까. 연기 같지 않은 연기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혼자 관찰 예능 찍는 느낌이다. 배두나의 평소 캐릭터와 잘 맞는 배역을 맡은 듯하다. 조승우가 연기를 했으면 배두나는 그냥 카메라 앞에 본인을 드러냈다.
아, 생각해보니 2016년에도 드라마에 하나 치였다. 바로 시그널이다. 조진웅과 이제훈 그리고 김혜수가 나오는 드라마다. 과거의 조진웅과 현재의 이제훈이 무전기를 통해 연결되고, 장기미제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조진웅의 죽음의 미스테리를 밝히는 내용이다.
이제훈의 연기가 좀 과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막판엔 잘 녹았다. 한국의 흔한 드라마와 달리 남캐가 민폐캐릭터라는 신기한 설정이다. 드라마를 보면 조진웅의 연기에 감탄하고 김혜수의 연기에 좀 실망하게 된다. 왜 이렇게 어색하지... 싶더라. 조진웅의 화내는 연기, 우는 연기, 웃는 연기 다 완벽하다.
비밀의 숲의 황시목과 시그널의 이재한은 닮았다. 황시목은 좌고우면 하지 않고 비리의 뿌리를 캐내려 한다. 선배들이 뭐라 해도, 경찰 간부가 방해해도 상관없다. 본인이 용의자로 몰려도 상관없다. 이재한 역시 마찬가지다. 상사가 증거를 은닉하고, 현장의 동료와 지역사회의 유지가 범인을 비호하지만 상관없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참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이 사람들은 불이익은 참아도 불의는 못참는다. 자기 입으로 정의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 사람들은 누구보다 정의에 충실하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정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황시목은 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감정을 잃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도, 동료가 가족을 뒷조사하고 언론이 본인의 사생활을 캐내도 표정에 미동 하나 없다. 나였으면 표정부터 뱃살까지 요동쳤을텐데. 이재한은 더하다. 10년 전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진범을 캐내려 한다. 누가 봐도 없어졌을법한 증거를 찾기 위해 쓰레기산을 뒤진다. 그렇게 찾은 증거 때문에 목숨까지 잃는다. 총 맞고 하는 이야기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거다. 그간 내가 포기한 다이어트를 별에 헤아려 세어본다. 별빛이 내린다.
정의로운 캐릭터는 그렇다. 비인간적이다. 감정을 잃은 검사와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열혈경찰은 되어야 정의를 논할 수 있다. 사사로운 정과 미안한 마음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정을 잃어야, 대의를 위해 자기 목숨따위 아깝지 않아야 정의로울 수 있다. 그래야 약자를 구할 수 있다. 조승우와 조진웅의 캐릭터가 멋있을지언정 공감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에 반해 나쁜 캐릭터는 인간적이다.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하루하루 버티다보니 악당이 되어버린 검사, 딸 아이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약간의 뇌물은 받고 넘어가는 경찰, 평생을 따른 선배를 버리지 못하는 후배까지 말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인간적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인간적으로 나쁜 사람이 됐다. 거참, 인간적인 드라마다.
드라마는 씻김굿이다. 무료함과 고단함으로 가득한 단조로운 일상에 짜릿함을 준다. 피로를 닦아준다. 정의를 논하는 드라마는 더더욱 그렇다. 위증을 해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전 장관, 같은 군인이라고 수사에 미적지근한 군검찰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이 황시목과 이재한을 보며 풀린다. 황시목과 이재한은 무당이다.
드라마는 현실의 반영이다. 비밀의 숲과 시그널은 실제 사건에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가 안다. 설령 사건의 디테일은 다를지언정 사건의 구조는 현실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말이다. 스폰서 검사와 경찰 내 찍어내기와 초동수사 미진으로 인한 검거 실패 등은 더이상 소설이 아니다.
비정상이 되어야 정의를 논하는 것도 현실이다. 감정을 잃고,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정의롭게 살 수 있다. 정의라는 두글자는 쓰기 쉽고, 말하기 쉬울지언정 가슴에 담기 어렵다. 탄핵, 부정부패, 갑질 등 거악에 화낼 수 있지만 눈앞의 부조리에 소리치기 어렵다. 분명히 나쁘고 이상한 일인데 화내면 내가 이상해진다. 나만 힘들어진다.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 책은 많이 팔렸는데, 여전히 정의는 우리와 멀다.
비밀의 숲 속 배두나는 피의자를 폭행해 증언을 받아낸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한 사람보다, 내 곁에 평범한 동료들이 이랬다는 걸 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들이 처음부터 잔인하고 악마라 그랬겠나. 하다 보니 되고, 눈 감고 침묵하니까 이러는 거다. 누구 하나만 제대로 짖어주면 바뀔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선택을 빙자한 침묵을 강요받았을까. 난 절대 타협할 수 없다.
사회문제는 대개 한두 명의 히틀러가 아니라 수백 명의 아이히만이 만들어낸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수많은 악행을 기억한다. 악행을 관행이라고 퉁치니, 악습이 역사가 된다. 역사가 구조가 되니, 우린 악인이 될 수밖에 없다. 악인이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다. 다만 악인의 길목에서 침묵했을뿐이다.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일은 어렵다. 황시목과 이재한은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 가능한 인물이다. 모두가 운동가가 될 수 없듯이, 우리 모두 황시목과 이재한 그리고 한여진이 될 수 없다.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는 한여진과 황시목 그리고 이재한과 같은 소수의 비정상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너와 나 그리고 고궁을 나서는 김수영과 같은 다수의 '정상'이 진짜 정상이 되어야 건강한 사회다. 적폐를 해소하고, 악습을 고치고, 새로운 사회를 위해선 우리 모두 비정상이 되어야 한다. 사회가 비정상을 지켜줘야 한다. 더이상 비정상이 비정상으로 불리지 않게끔 사희의 도움이 필요하다. 공익제보자는 그 첫걸음일 거다.
아니면 말구.
http://www.nocutnews.co.kr/news/4818277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70501
http://www.nocutnews.co.kr/news/4826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