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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Oct 31. 2017

숙의민주주의, 언론, 김주혁.

장면 1. 숙의민주주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집 앞 이웃은 믿지 못할 사람이 된 각박한 사회다. 이 세상에서 신뢰를 잃기는커녕 믿고 따라야 할 엄중한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여론이다. 민심은 천심이요, 여론은 민심의 바로미터니 박근혜 대통령의 부하는 적어야 살았고, 여론은 믿어야 살았다. 


요즘엔 이 여론이라는 단어에 공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공론이다. 공론은 숙의민주주의에서 시민의 뜻을 말한다. 숙의민주주의는 영어로 deliberative democracy 라고 한다. 심도 깊은 토론과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국정화교과서도 믿고 발췌하는 위키백과에 따르면 단순한 투표가 아닌 실제적 숙의를 통해 결정하는 민주주의라고 한다. 


숙의민주주의가 재수없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평상시에 보이는 여론을 마치 덜떨어진 것처럼 치부하고 숙의에 따른 공론은 둘도 없는 현자타임의 결과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숙의민주주의의 산물이라 불리는 신고리 원전 공론화 위원회의 시민 참여단은 고작 2박 3일 공부했을 뿐이다. (오버해서) 평생을 공부하고 현업에 종사한 전문가의 이야기는 자낳괴 혹은 믿지 못할 환경전문가로 치부하고 공론 조사에는 복종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공론화위원회를 자주 가동하는 것보다 전문가들의 100분 토론을 공영방송에서 주구장창 방송하고, 시민이 전화로 조사 때리는 게 나을 수 있다. 공론 및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높은 신뢰는 자기 뜻과 다른 여론을 피하기 위한 인지부조화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하, 재수없지만 인정해야 한다. 시민 참여단이 2박 3일간 접한 양질의 정보와 그에 따른 심사숙고는 방송뉴스와 신문기사로만 원전을 공부한 내 숙고보다 나을테다. 


장면 2. 언론


언론의 기능과 의무가 무엇이냐 물으면 수십가지를 댄다. 그 중 하나는 바로 교육기능이다. 드라마 <왕초>와 <야인시대>에서 거렁뱅이 꼬마애가 “호외요, 호외”를 외치듯이 언론은 가장 신속하게 대중에게 정보를 준다. 기획보도로는 깊은 정보를 준다. 우리가 원전 재개와 중단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대부분 언론에서 나왔다. 그만큼, 언론은 우리에게 좋은 정보원이자 짜장면 덮개이자 교육자다. 


숙의민주주의가 증명하는 것은 언론의 교육기능이 고장났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일상에 언론의 교육기능이 곳곳에 스며들었다면, 평상시의 여론과 공론화 위원회의 공론을 구분하지 않아도 됐다. 시민을 가르치고 중요한 사안에 토론의 장을 열어주어야 하는 언론의 기능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장난 지 오래다. 

슬프지만, 시민은 더이상 언론을 믿지 않는다. 자기 뜻에 반하는 언론을 믿지 않는다. 언론 역시 설득하고 교육하기보다 그저 전달하는 데에 급급한 인상이다. 성실하고 훌륭한 기자가 많고 좋은 기사도 많지만 결과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마냥 공급자를 탓하기도, 소비자를 탓하기도 그렇다. 양사이드에 잘못이 있다. 공론화위원회에 맡겨야 한다. 


장면 3. 기레기와 김주혁. 


김주혁이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운전 중 심근경색으로 인한 추돌사고가 아닐까 싶다. 

알지도 못하는 연예인 한 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에 큰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공유 한 번, 사진 업로드 한 번, 다른 사람이 쓴 글에 누르는 슬퍼요 한 번이다. 많은 비용이 투입되지 않으니 우리의 기분을 전환하는 데에도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의 예전 영화를 공유하고 슬퍼요를 눌렀지만, 금세 다른 사람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실없는 댓글을 썼다. 


하지만, 언론이 그래선 안됐다. 최초로 보도한 MBN은 최초 보도 이후에도 수많은 단독 타이틀을 달아 기사를 올렸다. 월간조선은 그의 사고 현장에 단독을 붙였고 한국경제TV는 그와 그의 아버지 배우 김무생씨의 일화를 소개하는 기사를 올렸다. 허망하게 떠난 한 배우에게 조의를 표하는 데에 몇 초가 걸리지 않았고, 그의 가는 길을 모욕하는 데에도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기레기. 세월호 사건 이후 기자라는 직업 계층을 멸시하며 부르는 말이다. 언론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현상을 뜻한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언론이 보여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심금을 울리는 문장을 담은 부고기사나 그의 작품 세계를 분석한 기사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최소한 그의 죽음을 가십거리로 소비해 클릭질로 치환하지 않길 바란다. 


기레기. 한 연예인의 죽음 앞에 언론은 또 다시 클릭장사에 미친 기레기가 됐다. 민주주의에서 시민을 교육해야 할 언론은 기레기라 불리며 다시 한 번 스스로 신뢰도를 깎아내렸다. 온라인 기자라서, 복붙하는 기자라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지 말자.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고, 텍스트를 넘은 컨텍스트를 제공해 이슈의 방향을 보여주고, 궁극적으로 시민을 교육해야 할 언론이 의무를 다하지 않은 현실의 방증이 숙의민주주의다. 여론에 대한 멸시와 낮은 신뢰도는 결국 여론 형성에 기여해야 할 언론이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판을 넘어 해결책과 방향을 보여주고, 반성을 넘어 개선을 보여주어도 모자랄 시기에 언론은 다시 한 번 스스로 얼굴에 먹칠했다. 언론사와 언론이 구분되지 않는 시대에 언론사의 낯뜨거운 클릭낚시는 언론에 대한 낮은 신뢰도로, 뉴스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시민이 뉴스를 보지 않고 언론을 믿지 않는 현실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한 번 돌아봤으면 좋겠다. 자정과 개선은 본인에게도 돌아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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