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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Oct 25. 2017

그래도 되는 건 없다.

담배는 안하고 술은 마시지 않는다. 이쯤되면 몸에 착한 일만 하는데, 왜 감기에 걸렸을까 싶다. 환절기는 무서운 놈이다. 술알못이지만, 맥주가 오아시스였던 때가 있다. 1학년 때의 아카라카를 기억한다. 응원을 하기에 좁은 노천극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몸이 기억하는 응원을 했다. 가수는 누가 왔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고대 사람이 여기저기에 차인다는 응원가였는지, 꿈틀거리는 응원가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 모를, 얼굴 모를, 과 모를 연대생과 함께 고대가 까이는 응원가를 불렀다. 왠지 모르게 가운데에 끌려가 제물이 됐다. 열심히 응원하고나니 목이 말랐다. 아이스박스에 맥주를 담아온 연대분이 맥주를 건네줬는데, 세상에나. 그때의 맥주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축제가 그렇다. 이름은커녕 과도 알지 못하는 서로가 만나 신나게 놀고 갈 수 있는 자리다. 선배, 후배, 아들, 딸, 대리님, 과장님, 부장님, 인턴과 같은 사회에서 부여한 이름이 없는 공간이다. 오늘 하루 놀고 가도, 딱히 부담없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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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생각없이 행동하는 사람도 특정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개썅마이웨이로 사는 사람이라도 사실 사회의 규범을 어느 정도 지키면서 살아간다. 이를 어려운 말로 사회적 규범(Social norm)이라고 한다. 장소와 지위에 따른 규범이 다르고, 준거 집단에 따라 규범이 다르다. 길가다가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고대가 꿈틀거리네" 하면 진짜 미친 놈이지만, 아카라카에선 가능하다. 고연전에서도 괜찮다. 그정도는 허용된다. 


축제가 즐거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평소에 지켜야할 규범과 평소에 했으면 이상하게 봤을 법한 행동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쓰는 페르소나를 부수고, 축제 전용 페르소나를 만든다. 하루쯤은 괴상하게 춤을 춰도 되고, 하루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술을 개쳐먹고 응원가를 불러도 된다. 토하는 진상 친구도 하루쯤은 오케이다. 다른 규범은, 다른 페르소나를 만들고, 다른 행동을 낳는다. 


요지는 "여기서는 그래도 된다"는 뜻이다. 공공장소니까 예절을 지키듯이, 축제니까 예절을 (어느 정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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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그래도 된다"라는 말처럼 무서운 문구가 없다. 마치 정언명령이다. 내 모든 행동에 근거를 준다. "그 일을 하는 이유는, 그래도 되니까"라고 말하면 답할 말이 없다. 저 문구가 가장 무서울 때는,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마저 어기는 근거가 될 때다. 


http://www.hankookilbo.com/v/04aa030dad184305a77c71d5a9fd4863


위 기사를 읽고 곰곰히 생각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왜 임신사실을 알면 무책임하게 도망가는 걸까. 대체 왜 그곳에서는 그럴까. 평소에선 멀쩡하게 직장생활을 할 분들이 왜 그곳에선 성관광에 미친 놈이 되는 걸까. 왜 도망가는 걸까.


거기서는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상이 이뤄지는 공간이 누군가에겐 모든 규범을 풀어도 되는 축제의 장이 된다. 그렇기에 저러는 거다. 본인이 일상을 보내는 한국에서 하지 않을 행동을, 필리핀에서 하는 이유다. 



http://www.hankookilbo.com/v/b86ecf910c034a04b9d0cac5348f0e6e

http://newstapa.org/42004

필리핀에서만 보이는 문제는 아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폭행은 '생명을 다루는 위급한 일'이라면서 합리화된다. 군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도 되니까. 그게 합리화되는 공간이니까 말이다. 


사실, 그래도 되는 일은 없다. 생명을 다루는 중한 일을 하기 때문에 폭행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군대에서의 갈굼과 폭행도 정당하지 않다. 필리핀이니까 그런 일을 해도 된다는 말은 가장 더럽다. 


저곳에서는 그래도 된다며 어기는 규칙은 사실 어디에서나 지켜야 할 규칙이다. 사람이기에, 사람 새끼라면 지켜야 할 규칙에 그래도 되는 건 없다. 어쩔 수 없는 것도 없다. 일상에서 불문율처럼 지켜져야 하는 규칙은, 어디서나 지켜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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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남자는 필리핀 여성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거다. 필리핀 여성에게 본명을 말하지도 않았을 거다. 본명을 말하는 순간, 여성이 이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이름을 기억하는 순간 본인에게 기억으로 남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기로 하고 보낸, 사랑이 담긴 불꽃은 하룻밤이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게 아니다. 이름을 묻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MBC 피디수첩 관계자가 검사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테다. 


이름을 남기고,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은 언제 어디에서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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