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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Feb 05. 2018

가족사진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친구의 집에 갔다. 무엇을 하고 사는지 모른다. 그 친구 아버지의 직업만 기억에 남는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꽤 높은 경찰 간부였다. 고덕역 근처에 위치한 주공 아파트 중 가장 비싼 5단지에 살았다. 그 집엔 가족사진이 있었다. 검은색이었는지 갈색이었는지 흐릿하지만 그 친구 아버지는 제복을 입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은 정장을 입고 웃고 있었다. 좋아보였다. 그 친구가 처음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추고 화목한 가정을 자랑하는 친구의 집에 가면 거진 그랬다. 가족사진. 내겐 거실에 걸린 가족 사진이 그 집안의 경제력과 화목함을 알 수 있는 척도였다. 혹은 박탈감의 상징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난 장례식장에 쓸 사진을 찾기 위해 외할머니 집에 갔다. 2주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의 장애인 관련 서류 싸인을 받기 위해 왔는데, 그때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라고 되뇌며 사진을 찾았다. 언제 찍었을지 모른 사진을 들고 집을 나갔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내내 생각했다. “우린 가족 사진이 없었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엄마와 삼촌들은 90년대 초반까지 빚쟁이에게 시달렸고 그런 걸 찍기엔 너무 거칠게 살았다. 시장에서 생선을 굽고 과일을 파셨단다. 할머니의 방에는 외삼촌 부부와 손주들 사진이 가득했다. 90년대 찍은 사진은 어느덧 세월이 묻어 노랗게 변했다. 할머니의 회갑연 때 작은 외삼촌이 할머니를 업고 있던 사진을 보았다. 그 옆에는 큰삼촌이 웃고 있었고, 나는 나보다 어린 외사촌동생에게 할머니의 애정을 뺏긴 게 분한듯 뾰루퉁했다. 


큰삼촌이 떠나고 삼촌의 핸드폰을 정리해야 했다. 23살인 내가 삼촌을 위해 할 일은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관련된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고, 연락 오는 것에 답하는 그런 잡무 같지 않은 잡무 말이다. 우리 엄마가 첫째 딸이지만, 부모를 모시는 일은 첫째 아들에게 돌아간다. 할머니의 금강산 여행, 제주도 여행은 큰삼촌이 도맡았다. 핸드폰엔 삼촌 부부와 할머니-할아버지의 여행이 담긴 영상이 있었다. 


“칠갑산 산마루에~”라는 가사를 외우고 있다. 내 또래가 이 노래를 들은 일은 옛날 나는 가수다에서 이영현이 부른 적 말고 없다. 뿌리는 외할머니한테 있다. 할머니는 칠갑산을 자주 불렀고, 나는 자주 흥얼거렸다. 그땐 할머니의 목소리가 자장가 같았고, 잘 기억했는데. 


핸드폰 영상 안에 담긴 삼촌은 행복해보였다. 할머니-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둘째 딸의 애교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영화 <코코>는 망각에 대한 이야기다. 현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아야 저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는 동화 같지만 내게 비수같았다. 어느덧 난 외할머니와 큰삼촌의 목소리를 많이 잊었다. “어이구, 우리 손자 부둥부둥” 이라던 할머니의 목소리만 남았다. 큰삼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조카, 엄마 몰래 비상금 필요하면 말해”라고 술취해서 호기를 부리던 삼촌의 목소리만 생각난다. 


혹자는 망각이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의문이 든다. 영화 보기 직전, 보현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나와 보현이는 연인과 망각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구보다 가깝고, 친했고, 사랑하던 사람이 그렇게 없던 사람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을 잊는 것을 넘어 당시의 나마저 잊는 슬픈 일이라는 이야기에 우리는 동의했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지만, 사진은 목소리를 담지 못한다. 사진을 제외하고 28살의 구현모에게 남은 할머니와 삼촌은 몇 마디 말에 불과하다. 내가 40살이 되고, 50살이 되고, 60살이 되었을 때 그 사람들을 잊을까 겁났고, 벌써 많이 잊은 듯해서 너무나 죄스러웠다. 


스스로 말하기에 부끄럽지만, 외갓집에게 나는 첫 손자를 넘어 하나의 상징이었단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하나의 마을이 필요한데, 난 외갓집이라는 마을을 하나로 묶는 그런 아이였단다. 식당이모 일을 하던 외할머니는 나를 돌보기 위해 집으로 들어왔고, 외할아버지는 다시 한 번 어금니를 꽉 깨물고 경비원 일을 시작했단다. 엄마는 “너가 생긴 이후에 외갓집이 평탄해졌어”라고 말했지만,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함함할테니 적당히 걸러 듣자. 


여튼 그런 손자였던 내가 어느덧 할머니와 큰삼촌을 잊었다는 것이 너무 죄스러웠고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었다. 이 점에서 <코코>는 내게 형벌과 같았다. 슬픔을 넘어 죄스러웠고 미안하고 스스로에게 역겨움마저 들었다. 아마 그 영화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거 같다. 내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니까. 


할머니가 그렇게 간 이후, 난 “외할머니의 생애사를 기록해야지”라고 마음먹었다. 전혀 시작하지 못했다. 그게 되면, 난 다시 코코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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