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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Mar 16. 2018

친구에 대한 이야기 두 가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생각하세요”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선린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항상 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훈화말씀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대화는 아니다.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 불려 나온 아이들은 듣지 않고 있었다. 몸을 배배 꼬아가며 버티다가 담임선생님이 뒤를 돌아보시면 장난치기마련이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다.차 안에 있는 사람은 건널목 신호등이 너무 길다고 툴툴댄다. 횡단보도에 있는 사람은 조금만 지나도 깜빡이는 신호등이 너무 짧다고 말한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냐에 따라 같은 현상을 보고 다르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는 결국 입장을 바꾸기 전까지 상대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인류 보편의 진리를 담고 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본인이 아파봐야 환자를 이해할 수 있고, 가난해봐야만 사회 안전망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내 때는 더 어려웠어”라고 말하는 선배에게 답답하다고 말했던 후배가 몇 년 뒤 “내 때는 말야”라고 말한 경우는 부지기수일테다. 객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적은 후보도 당당하게 출마하는 데엔 본인을 그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지지자가 많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사람은 끼리끼리 놀기 마련이다. 한 회사에서도 대학 동문끼리 만나고 동향 모임을 조직한다. 하다못해 애견인은 애견인끼리 모이고, 애묘인은 애묘인끼리 만난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좋은 친구들은 나와 닮아있기 마련이다. 취향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요소도 유사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본인과 닮은 사람에게 안락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편향이 심해진다. 부자들은 “요즘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가난한 사람이 있어?”라고 말하며 복지 확대에 반대하지만 여전히 빈곤층 5명 중 1명은 난방비가 없어 보일러를 키지 못한다. 어쩌면 한국 사회가 불통인 이유는 끼리끼리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끼리끼리 만나면 안락하다. 하지만 성장할 수 없다. 특정 성향의 친구들만 만나는 편중된 관계가 개인에게 필터 버블을 일으키고 인식을 편향되게 만든다. 편향된 인식에 갇혀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성장하지 못한다. 대중과 공감하지 못하는 엘리트가 일으킨 문제는 부지기수다. 결국, 내 옆에 있는 나와 닮은 친구들이 내 성장을 막는 장벽이다.  


사람을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친구를 소개시키는 일이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 다른 곳에 가기 마련이다. 다른 공간으로 가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 서는 데가 다르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최규석 작가의 말에 뼈가 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을 벗어나 격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친구를 만나자. 안락한 컴포트 존을 벗어나 불편한 세상으로 나아가 성장을 도모하면 어떨까. 




알트를 할 때, 청주에 갈 일이 있었다. 서울과 많이 다른 풍경이었다. 부끄럽지만 서울 바깥에서 산 경험이라곤, 아주 어릴 때 외할머니와 부평에서 살던 게 전부였기에 더욱 생경했다. 풍경만 다르지 않았다. 삶도 달랐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단 친구에게 시급이 얼마냐 물으니 5로 시작하는 숫자가 나왔다. 최저 시급보다 낮지 않냐고 다시 물으니 그건 서울의 이야기라고 답했다. 서울에서 당연했던 숫자인 최저 시급 6030원은 청주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만난 분들은 내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씀하셨고, 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고민했다. "인터넷으로 다 할 수 있는 시대에 왜 안돼요"라고 쉽게 타자를 칠 수 있지만, 말로 하기엔 염치없었다.


생각해보니, 축복 받은 삶이었다. 일단 좋은 친구들을 두었다. 품성말고, 경제적으로도 좋은 친구들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경제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상위 10% 아니 상위 1%에 가까웠다.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보내고 대학교를 간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수험생의 약 11%가 진학하는 인서울 대학교, 그 중에서도 상위권 대학교에 진학했으니 상위 10%가 아니라는 말은 기만이다. 


주위가 이렇다보니 하는 고민도 비슷하다. 대기업 취업을 고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실제로 취업한 친구들 대부분의 월급이 한국 중위소득인 200을 훌쩍 뛰어넘는다. 영어에 대한 고민보다 토익에 대한 고민, 토익에 대한 고민보다 990을 받고 싶다는 고민이 많다. 한국 사회 중위 소득은 200만원 언저리인데, 나와 친구들은 3천 연봉도 너무 낮은 게 아니냐고 투덜거렸다. 


상류층의 이야기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이 상류층의 이야기가 너무나 과대표되어있다. 잘 된 사람들만 동창회에 온다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빗대면, 한국 사회도 특정 계층 사람들의 이야기만 담론으로 치부된다. 지난 정부가 추진한 연말정산 개정은 연봉 7천만 원 이상 고소득자를 겨냥했다. 하지만 언론은 이를 서민증세와 세금폭탄이라 치부했다. 상류층의 주장이 사회의 담론으로 호도된 경우다.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선 나부터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반성은 내가 서있는 위치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일에서 시작한다. 내 주위 친구로 세상을 판단하지 말고, 내 의견이 너무 내 주위 사람들 위주로 편향되지 않았나 돌아봐야 한다. 사회를 기만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친구라는 에코채임버를 벗어나자. 여러모로 여러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http://news.donga.com/3/all/20180314/89086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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