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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n 25. 2018

[아무튼 글쓰기] 기록

2주차

세상은 기록의 역사다. 세상에 전유되는 모든 지식은 기록에서 나오고 우리는 기록물을 통해 배운다. 과거에서 오늘을 배우고 오늘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모든 과정은 기록물이 뒷받침한다. 그래서 대학은 논문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논문 사이트와 계약을 체결하고 사회는 기록물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공공도서관을 짓는다. 


하지만 양적 접근성 확대가 전부가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닿는 데엔 학부 4년이 걸렸다. 영어가 한국어보다 편했다. 영어로 쓰인 책을 가까이하고 한국어 책을 멀리했다. 적어도 그 수업에서만큼은 모든 이가 그랬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 때 비판커뮤니케이션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독일어로 쓰여진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 교재였는데 너무나 난잡했다. 비문투성이에 만연체였다. 영어 번역본이 이해하기 쉬울 정도였다. 노교수는 “우리 때는 번역이 안되어서 일본어로 된 책을 읽었는데, 그때 비하면 자네들은 축복받은 거야”라고 말하며 한국어 번역본을 나눠줬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빌린 영어번역본을 복사해 시험을 준비했다.


일본어 번역본으로 원서를 공부하던 청년이 노인이 될 정도로 시간인 흘렀지만 한국의 번역은 여전히 빈곤하다. 인문학을 살리자는 정부마저 정작 그 뿌리인 번역은 소외시켜왔기 때문이다. 사회의 지식을 쌓아야 할 교수는 “요즘 학생은 영어를 잘해”라며 번역서가 아닌 원서로 수업을 진행하고 교육부는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강의하는 대학에게 많은 지원금을 준다. 한국연구재단마저 번역예산을 6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였다. 한미 FTA에서 발생한 300군데에 달하는 번역 오류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국어 번역에 대한 소외는 지식의 양극화를 낳는다. 외국어에 능숙해서 거침없이 원서를 독해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질의 번역은 사회 전체의 학문 수준을 높인다.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일본 마스카와 교수는 영어 까막눈이었다. 지도교수가 영어 시험을 면제해주고나서 겨우 졸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노벨물리학상 수상 비결로 풍부한 자국어 번역물을 꼽았다. 일본어 번역물만으로 정확한 이해와 분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번역은 문화의 근간이기도 하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 정부는 낯선 서구 문물을 일본적 개념으로 받아들여 탈근대를 이루고자 번역청을 설립했다. 150년 전 일본에서 번역된 해외 고전 중 적지 않은 수가 아직도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고 한다. 소프트파워를 키우려는 중국은 이를 본따 번역국을 세워 번역국가표준을 만들었고 칸트 등 등 유명 철학자의 전집을 번역하고 있다고 한다. 캐나다와 유럽이 지식문화산업에 대한 투자 명목으로 번역부와 번역총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여겨 볼 만하다.


여러 단계에 걸쳐 뇌에 들어오는 외국어정보와 달리 모국어정보는 즉각적으로 유입되어 뇌를 자극한다. 옥스포드 대학의 로메인 교수는 이를 근거로 인간은 모국어로 사고할 때 가장 창의적이라고 말했다. 그간 한국 사회는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번역이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진단한다. 사회의 지식 수준을 높이고, 문화를 융성하고 사회의 창의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번역에 투자하면 어떨까. 글로벌 시대에 소외된 자국어 번역에 대한 조망이야말로 미래의 마중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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