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는 명일역 근처 카페이름이다.
오늘도 왔다. 명일역 근처에 있는 도로시라는 카페에 다시 왔다. 요즘 내 일상은 항상 도로시 카페에서 끝난다. 하루를 마감하는 데 이 장소를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행복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복을 입고 서로 깔깔대는 친구들, 서로의 손을 잡고 시답잖은 농을 주고받는 흰머리가 지긋한 중년 부부 그리고 골프센터에서 만난 아주머니들까지. 마법구두를 신고 오즈를 뛰어다니는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 이름을 본뜬 카페는 실로 마법 같은 공간이다. 바깥이 얼마나 습하고 더워도 여긴 선선한 웃음만이 가득하다.
이곳에 앉아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에 적막이 찾아온다. 아직 눈을 감기 이른 오후 9시지만, 이곳에서 내 마음은 잠이 든다. 오늘 하루 느꼈던 불안, 고통, 자기 연민, 자기혐오를 모두 씻어낸다. 카페에서 우울을 끝까지 토해내면, 머리 끝이 쭈뼛쭈뼛 선다.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눈이 갑자기 커지고, 잠은 사라진다. 불면의 오후 9시 9분은 나 혼자 보내야만 하는 시각이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은 저리듯 아프고 눈은 뻑뻑하지만 이 고통 모두 내가 감내해야 한다.
감정을 그렇게 쏟아내면, 남은 건 오래된 테가 나는, 이제 한 번쯤 새로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 법한 낡은 마음 바가지뿐이다. 하지만, 바꿀 수 없다. 카페 도로시에서 먹는 아이스 페퍼민트, 질소 아이스크림으로 바가지를 다시 깨끗하게 청소할 뿐이다.
지치고 지쳤지만, 툭 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넘어질 듯하지만 카페에 온다. 카페는 그런 공간이다. 오늘의 나를 보내고 내일의 나를 준비할 수 있는 일종의 샤워실, 아니 장례식장, 아니 어쩌면 세탁기.
카페에서 나는 가장 외롭지 않은 외로운 개인이 된다. 30여 평 되는 공간에 사람은 대여섯 명이 있지만, 우린 서로 아무런 말을 나누지 않고, 눈빛도 나누지 않지만, 서로를 의식한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개인으로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유대의 끈으로 이 공간을 채운다. 각자 모두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준비하며 말이다.
생각해보면, 삶은 열등감과 자기 연민 그리고 자기 위로 사이에 갈팡질팡하는 걸음이다. 그래서 다시 영화 <동주>를 봤다. 점점 쪼그라드는 나와, 이 내 모습이 역겨운 나 그리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고 너무나 미운 나를 투영하고 싶어 말이다.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그렸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죽기 직전까지 윤동주의 삶을 그린다. 윤동주라는 시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부끄러움의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받는다는 점과 그의 시가 연세대학교 응원가라는 사실밖에 알지 못한다. 시에 큰 관심이 없다.
다시 봐도 재밌었다. 특히 매력적인 이유는 이 영화가 본인 스스로를 '열등감의 화신'으로 칭하는 감독 이준익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일본 순사의 말 그대로 ‘송몽규의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본인이 그렇게 바라던 신춘문예를 몽규는 한 번에 통과한다. 심지어 중국에서 운동하다 온 주제에 바로 연희전문학교에 합격한다. 공부를 쉬지 않은 자신은 교토 제대에 탈락하지만 몽규는 붙는다. 라이벌이라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다.
영화는 윤동주의 열등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가진 몽규가 “시 따위 세상을 바꾸지 못해”라고 말하자, 동주는 반발한다. 모든 것이 자신보다 우월한 몽규에게, 자신의 영혼마저 부정당했다.
하지만 동주는 안다. 몽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니, 적어도 자신의 시가 몽규의 사상만큼 세상을 바꾸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동주는 고민한다. 왜 몽규는 자신을 항상 내버려두고 떠나는지. 왜 자신은 몽규와 같은 선상에서, 같은 곳에서,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지 몽규에게 토로한다. 몽규의 선의에 의한 행동일지언정, 동주에겐 패배감만이 든다. 몽규의 우월함에서 나오는, 호혜적 선의가 아닐지 동주의 열등감은 생각한다.
몽규와 동등해지기 위해 동주는 몽주와 같은 배를 탄다. 항일운동을 한다. 비로소 몽규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여전히 동주는 결핍을 느낀다.
동주는 몽규의 그림자가 아닌 동주로서 존재하길 결정한다. 몽규와 같이 기차를 타지 않고 본인의 시집을 기다린다. 삶의 끝에서 동주는 몽규의 그림자이자 몽규의 죽마고우가 아닌 자신을 택한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비아냥을 받지만 개개인의 가슴에 씨앗을 남기는 윤동주로서 존재하길 결정한다. 그간 항일독립운동에 열정적이지 못하던 동주는 오히려 스스로 본인을 인정하고 나서 스스로를 사랑하고 타인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었다. 순사에게 끌려간 이후, 그러니까 본인의 시집을 본 이후 동주는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다.
영화 <동주>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아래다. 몽규가 임정의 자금줄을 대기 위해 운동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잡혔다. 공부하던 동주는 몽규를 면회했다. 동주와 몽규는 대비된다. 깔끔한 옷을 입고, 멀끔한 동주의 얼굴과 후줄근한 옷을 입고 얼굴에 멍이 든 몽규. 철창 바깥의 동주와 철창 안의 몽규.
내겐 오히려 동주가 감옥에 갇힌 듯 보였다. 몽규라는 열등감이 주는 감옥 말이다. 동주는 끝까지 몽규라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 끝까지 몽규에게 영향받고, 몽규와 함께 있길 원한다. 그에 비해 몽규는 자유롭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을 위해 자신을 활활 불태운다. 비록 좌절하지만 뛰쳐나간다.
동주는 묻는다. 너는 왜 그렇게 사냐고, 나와 같이 공부를 할 생각이 없냐고. 몽규는 회피한다. 동주는 몽규에게 끝까지 자신과 같은 세계에 남아주길 바라지만, 몽규는 거절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얻는, 그렇지만 자신에게 잡혀주지 않는 몽규라는 열등감의 감옥에 동주는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갇혀있다.
내 능력이 타인에 비교하고, 타인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과정은 곧 타인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또 다른 감옥으로 나를 이끈다. 동주에게 몽규는 감옥이다. 항상 모든 것을 비교하고, 잡으려 한다. 자신의 옆에 몽규를 두려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이 몽규에게 종속됐기 때문이다.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 종속이고, 반대는 자존이다. 자존 일지, 자립 일지, 독립 일지 모르지만 각 단어에 공통으로 교차하는 뜻은 ‘스스로 존재함’이다. 타인과 비교하되 사실적으로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 평가해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는 수준.
열등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반에서 줄 세우는 문화에서 공부하고, 떠들면 뺨 맞는 문화에서 공부한 게 우리다. 집단에서 개인은 타인과 비교’당함’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나라는 존재는 집단이 원하는 기준에 의해 평가받고, 열등감을 강요받는다. 어쨌거나 지금과 같은 시스템에서 열등감은 필수이자 의무와 같다.
사람에게 열등감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남을 기준으로 나를 재는 방법은 맵고 짜다고 표현할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만큼 건강에 좋지 않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때, 열등감을 이용하면 부족함을 채웠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진정한 발전과 실현은 스스로에게 나올 때 가장 완벽하다.
그렇다고 열등감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련다. 오히려 난 열등감을 긍정하는 편이다. 얼마나 인간적인 감정인가. 지울 수 없는 무언가를 부정하는 행위는 곧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과 비슷하다. 잘라지지 않는 혹을 부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몸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모든 건 정도의 문제다.
천호역에서 340번 버스를 타든, 강동 05번 버스를 타든 집 근처에 오는 건 마찬가지다. 누가 먼저 가든, 누가 1인석에 앉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내가 갈 곳이 있느냐 없느냐, 그 장소가 나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다. 340을 타고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간다고 해서, 같은 버스에서 쟤는 앉아서 간다 그래서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우리 모두 각자 갈 길이 있고, 그곳을 그냥 뚜벅뚜벅 재밌고 유쾌하게 걸으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자아실현이 아니라 타아 실현을 해온 게 아닐까 가끔 반성한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미워한다. 친구는 자기 스스로를 사랑해야 남을 바라보고 사랑할 줄 안다고 하지만 난 스스로가 너무 밉고 싫다. 거울을 보면 부족함이 보이고, 그 부족함에 힘들어하는 내가 보인다. 차라리 보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 다시, 도로시에 우울을 쏟아낸다.
- 말은 이렇게 해도 난 열등감이 많고 비겁한 사람이다. 내 부족함을 조우할 때(무섭긴 하지만, 무섭다고 가만히 있으면 더 쭈구리된다), 그 순간이 너무 짜증 나지만 그냥 끄덕일 수 있게끔 자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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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한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