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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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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l 29. 2018

고통을 감각하기

타인의 고통을. 

그 날처럼 미열이 올랐다. 지난 1달의 긴장이 조금 풀려서인지, 아침부터 돌아다녀서였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홍대에서 점심을 먹고 시청 근처에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카페에 갔다. 정신없이 글 하나를 마무리하니 몸에 열이 느껴졌다. 더운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원인 불명의 강직성 척추염. 내 진단서에 쓰여있던 그놈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몇 달 동안 스트레스받을 일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몸 컨디션이 내내 좋지 않았다. 그동안 이 놈이 고개를 못 들게 잘 조여 맸는데, 긴장이 좀 풀려서였는지 오랜만에 날 찾아왔다.  


오랜만에 아픔을 감각했다. 눈은 뻑뻑하고, 약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미열이 오르니 집중이 잘 되지 않았고 그래서 책상 위에 잠시 엎드렸다. 고개를 드니 어지러웠다. 그 순간 내 손가락은 무심하게, 무의식적으로 하지만 미친 듯이 팔뚝을 긁고 있었다. 공공장소였지만, 공개된 카페였지만 계속 긁어버렸다. 마치 더러운 무언가가 묻었던 것처럼 계속 긁었다. 정신 차려보니 손톱엔 피가 묻어 있었다.  


내 팔 엔 수많은 딱지와 상처 자국이 있다. 아니, 전신에 있다.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 그리고 팔과 등과 목까지. 친구 H는 속옷을 조였을 때 몸에 생기는 자국을 ‘상흔’이라 표현했다. 내 몸에 남은, 억지로 조인 속옷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긁어서 남은 상처는 성흔일까 상흔일까. 내 와이셔츠엔 매일 피가 묻어난다.  


묻어난 피를 대충 닦아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손톱이 시작되는, 그 흰 반달 같은 부분엔 피 묻은 자국이 있었다. “내가 손을 너무 대충 닦았구나” 싶어서 다시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언가 초라했다. 음식이 아닌 내 피가 묻은 손을 닦는데 너무나 무심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수술하는 의사처럼, 너무나 반복한 나머지 더 이상 동요하지 않는 장의사처럼.  


카페는 8시에 문을 닫았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다른 장소에 갔다. 광화문역 근처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면세점 근처 출구로 나오니, “가짜 난민 반대”라는 푯말을 든 시위대를 만났다. 30대로 보이는 여성분들이 서명을 받고 있었다. 어설픈 연민으로 인해 나라가 망한다는 표어였다. 예멘 난민이 윈터 솔저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니. 무한도전이 종영했는데 MBC는 멀쩡하잖아.라고 속으로 말했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샀다. 곧 헤어지는 친구를 위한 선물을 샀고, 나를 위해 책을 샀다. 아, 습관이 하나 생겼다. 1달에 한 번 드래곤볼 피겨를 사고, 책을 폭식한다. 어제도 10만 원어치 책을 샀고, 오늘도 3권이나 사버렸다. 책의 종류는 다양하다. 내 딴에는 시야를 넓히고 감각을 넓히고 나를 넓히는 일이라고 하지만, 수집욕을 채우는 일이다.  


넓은 교보문고를 걷고, 친구를 만나기로 한 카페에 갔다. 카페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적당히 차오른 미열과 에어프라이어 기와 같은 열기 그리고 구두에 적당히 쓸린 발등과 발뒤꿈치까지. 콜드 브루 한 잔과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 때문에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친구는 죽어가는 생명을 보는 일이 가장 아프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면 힘들어서 어떻게 해”라고 말했고, 친구는 “적당히 조절해야지”라고 답했던 듯하다.  


내 아픔을 감각하는 일은 쉽다. 온도계 없이 나는 미열을 알 수 있었다. 내 고통은 문자 그대로 체감한다. 하지만 타인의 아픔을 감각하는 일은 어렵다. 타인의 고통을 감각할수록 스트레스받고 마음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럴까. 우린 타인의 고통을 내 멋대로 재단하고, 제멋대로 사과한다. 때로는 타인의 고통 자체를 무시한다. 난 눈치를 많이 보지만, 눈치 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많이 신경 쓰지만, 정작 내가 행동할 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만큼 무례했고, 둔감했고,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이었다’라고 쓰고 싶지만, 그만큼의 염치는 있다. 회피하려들지, 마주하려 들지 않는다. 변명하려들지,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그저 사람의 본능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 정도의 염치는 있다. 내 행복과 고통이 온전히 나의 것이듯이, 내 잘못도 내 것이다. 보편적 잘못으로 넓힐수록, 누구나 그렇다고 말할수록 변명에 불과하다. 


가짜 난민을 반대한다는 푯말을 든 사람은 자신의 고통에 민감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듯하다.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은 인간 세상에 살기 위해 청각을 적당히 둔감하게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우린 타인에게 더 민감하고 예민해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는 센서를 꺼두어야만 살 수 있다는 말이 오고 갈 때, 그런 일에 불편해하고 그런 사람 걱정할 시간에 니 일이나 하라고 할 때, 연민은 낭비라고 말할 때 우리는 지옥도에 들어간다. 내 고통에만 예민하고, 타인에게 둔감할 때 우리는 아귀가 된다.  


집에 와서 발을 닦으니 발등과 발뒤꿈치가 다 까져 피가 나있었다. 이 정도였나. 몰랐다. 매일 신던 신발인데, 내 뒤꿈치와 발등에 상처를 만들었다. 양말을 신지 않아서 그런 걸까. 우린 양말이 되어야 한다. 서로의 고통을 묻어줄 수 있는. 잊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양말. 신발 같은 세상과의 상처를 닦아주고 가려줄 수 있는 그런 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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