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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Aug 02. 2018

음식, 음악, 책, 여행 / 덕후 다시 읽기 / 설계

최신 구현모 특 : 쉽게 체함. 개복치임

브랜드 마케터. 얼핏 들어보면 너무나 좋고, 자세히 뜯어보면 무슨 직업인지 알기 애매모호한 단어. 그 단어에 배달의 민족, 스페이스 오디티, 에어비엔비, 트레바리를 끼얹으니 땡길 수밖에. 내가 퍼블리에서 이 콘텐츠를 읽고, 심지어 책까지 따로 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터넷으론 완독 했으나 책은 아직. 


근데,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브랜딩과 마케팅만큼이나 내 삶에 음식, 음악, 책, 여행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음식, 애증. 


소화가 잘 안 된다. 아침에 음식 냄새를 맡으면 속이 역하고, 점심은 왠지 속이 부대낀다. 자주 체했다. 토도 자주 한다. 저녁도 최대한 적게 먹으려고 한다. 전반적으로 소화기관의 능력이 떨어졌는데, 이유를 알 수 없다. 주량은 점점 줄어 이제 맥주 500만 먹어도 얼굴이 벌게지고 잠이 온다.  


음식은 애증이다. 음식은 너무나 좋지만, 만들긴 귀찮다. 날 위한 음식을 만들며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지만, 귀찮긴 하다. 음식이라는 메인 코스보다 준비라는 애피타이저 그리고 설거지라는 후식이 너무 별로다. 맛있는 음식은 좋지만 살찐다.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살찌더라. 그렇다. 내가 한 식탐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카페 도로시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이다. 적당히 달달하고, 체할 일도 없다.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서 허겁지겁 입안에 쑤셔 넣는다. 적당히 녹았지만 여전히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내 식도와 위장의 위치를 알려주면, 그제야 내 내장기관이 멀쩡하구나 안심할 수 있다. 정신은 어디 간지 모르겠지만. 


흔히 음식은 먹는 순간을 위해, 그 한 순간을 위해 열 순간 고생하는 꼴이다. 하나의 정점을 위해 끊임없이 꼬여있는 선과 면을 거쳐야 한다. 이런 비효율의 극치.  


그럼에도 혼자 먹는 밥과, 혼자 해 먹는 밥이 각광받는 이유는 이제 진부하지만 오롯이 날 위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게 후다닥 먹기 위해서든, 내 미각을 위해서든, 개인의 기호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물이 음식이다. 복잡다단한 개별 인간의 혀를 만족시키기 위해선, 직접 뛰어야 한다. 


음악, 외로움. 


음악을 잘 듣지 않게 됐다. 부대끼는 출근길에 나와 대화하지 않는 음악보다 대화해주는 팟캐스트가 맘에 들었다. 퇴근길에 웃고 싶어서 푹으로 무한도전을 본다. 가끔 책을 읽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음악의 자리가 점점 사라진다. 예전에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친구들이 이해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기어 아이콘은 음악이 아닌 송은이와 김숙의 목소리만을 전달한다. 오디오 콘텐츠 시장에, 어쩌면 음악은 위기일 수도.  


음악은, 들을 때마다 홀로 되고 외로운 공간이다. 귀에 딱 맞게 이어폰을 쑤시고, 에어프라이어기와 같은 열기를 뚫고 집에 가는 그 길은 순전히 나만의 공간이며, 순전히 나만이 버텨야 하는 외로움과 중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외로움을 해치우고, 중력을 함께 버틸 사람을 찾아 누군가는 전화를 하고, 나는 목소리가 나오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박제된 목소리. 라이브가 아닌 디지털 음원은 박제된 목소리다. 이상은 소설을 통해 박제된 천재를 전시했다. 나는 박제된 목소리가 지겨운, 박제된. 음. 그냥 박제. 


음원을 들을 때마다 죽은 목소리 같다. 그래서 어떤 노래를 들어도 외롭다. 


책. 따봉.  


책을 폭식한다. 전이라면 엄두도 못 냈을 텐데, 책을 10만 원어치씩 꽤 자주 산다. 그만큼 읽냐고 물으면, 전보다 많이 읽긴 한다. 책을 꼼꼼하게 읽지 않아도 되고, 막 다뤄도 되고, 발췌독만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더 쉬이 읽힌다. 내용이 잘 뽑히냐고? 음. 이렇게 관점을 돌려보자. 


완독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을 때, 나는 책과 일방향으로 대화했다. 그 책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었을 뿐이다. 책이 갑이고, 내가 을이었다. 근데 발췌독으로 바꾸고 마구마구 밑줄을 긋다 보니 그 권력관계가 바뀌었다. 내 생각을 마구 덧대었고, 이를 브런치에 옮겼다. 내 생각을 적당히 끼얹으니 같은 책으로도 다른 글이 나오고, 그러다 보니 따봉이 달리고 난 따봉에 중독되고..... 


책은 따봉이다.  


여행, 장례식


난 뒤늦게 후회하고, 봄이 지나고 나서야 아는 미련한 놈이다. 그래서 그런지, 장례식에 갈 때마다 삶의 열의가 차오른다. 누군가의 삶의 끝에서 내 삶의 새로운 시작을 그리는 그런 이기적이고 무서운 놈.  


내게 여행은 장례식이었다. 무언가를 정리하고, 새롭게 털어버리고, 다시금 준비하는 자리 말이다. 어제까지 얼마나 힘들게 부대꼈든, 거기서는 새로이 시작하고 움직여야 하니까 말이다. 여행이 끝날 때는 다시 서울에서 삶을 그리기 위해 적당히 고민하는. 이도 저도 아닌 문자 그대로 이방인이었다. 여행지에 있지만 여행지에 있지 않은, 그런 삶. 


음식, 음악, 책, 여행은 도구다. 발판이다. 적당히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고, 적당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 글쓰기 위해 책을 읽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여행 간다.  


결국, 중요한 건 발판을 딛고 가고자 하는 도착지점이다. 도착지점은 각자 다르다. 개별 사람의 도착 지점을 알기 위해 우리는 그 사람들이 그 발판에 무슨 이름표를 붙이는지 봐야 한다. 누구는 자기를 채우기 위해, 나는 따봉을 받기 위해 책을 받듯이. 


그렇다면 그 방향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아마 결핍. 그 사람이 지향하는 방향을 알고서,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다. 반대도 가능하고. 무엇이 먼저인진 모르겠다.  



덕후 다시 읽기.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는 문장을 적당히 비웃었다. 어른들이 바라는 요즘 것들의 패기가 적당히 변주된, 새로운 그런 허울뿐인 슬로건이라 생각했다.  


근데, 이제 알겠다. 덕후는 그 누구보다 본인의 취향을 저격당한 사람이다. 얼마나 저격당했으면 저격수한테 지갑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삶을 태운다. 그렇게 저격당해보니, 어떤 포인트를 노려야 하는 줄 안다. 괜히 박찬욱을 ‘배운 변태’라고 하는 게 아니다. 아는 사람은 다르다. 


덕후는 몰입도가 어마어마하다. 하나에 꽂혀 시속 180킬로미터로 달리고, 오버클럭 할 줄 안다. 몰입은 중요하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봐왔던 그 수천만 가지의 미래를 파악할 수 있다. 몰입은 집중이고, 그 집중은 일종의 사랑이다. 열렬하게, 많이, 최고 속력으로 달려본 사람만이 누군가를 달려오게 할 수 있다. 바다를 갈망한 사람만이, 배를 만들게 조련할 수 있는 사람이듯이. 


결국,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무언가에 몰입한 경험으로 다른 일에 집중해서 무언가 하나 크게 한 탕하라는 뜻이다.  


디자인. 설계. 


어쩌다 보니 UI를 계속 뒤져봤다. 근데, 그러면 그럴수록 내게 디자인은 ‘설계’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누가 했는지 모른다. 아, 그리고 혹시 “열등감이라는 냄새”가 난다는 문장을 보신 적이 있나요?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르는데 기억이 안 남).  


설계. 그래. 난 촌스럽다. 싸이가 자신을 월드스타나, 그런 호칭이 아닌 국제가수로 불러달라고 하듯이 난 디자인보다 설계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도면을 그리고 뚝딱이는 행위가 떠오르는데, 사실 디자인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닐까. 사용자를 예측하고 본인이 그리는 대로 최대한 이끌어오는 미로를 그리는 그런 행위. 설계해야 한다.  



아까 체한 게 아직 안 내려온다. 죽겠다. 우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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