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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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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Aug 23. 2018

증류 사회


어릴 때 많이 아팠다. 지금이야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젠데, 그땐 너무 안 먹어서 문제였다. 계절이 바뀌면 골골대고, 학기가 시작하면 골골대고, 방학이면 방학이라고 골골댔다. 태권도와 수학 학원에 가기 싫어 지어낸 꾀병도 있다만, 그래도 많이 아팠다.  


둔촌동에 사는 온갖 이비인후과에 갔지만, 지금 기억나는 병원은 머리가 다 빠진 할아버지가 이상한 한약 같은 약을 코에 발라주는 둔촌 종합 상가 맞은 편 이비인후과다. 밑에는 롯데리아가 있고, 그 옆에는 주유소가 있던 그 건물. 근데, 나 그 건물에서 피 많이 봤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둔촌동 현대 3차 아파트에 살던 나는 감기에 걸리면 아까 말한 그 이비인후과에 갔다. 멀지만 갈 만 했다. 환절기 감기에 걸린 나는 태권도 도복을 입고 병원에 갔다. 한약 냄새가 나는 약을 코에 바르고, 그 빨간색 불빛이 나오는 헤어드라이기 같은 온열기를 코에 댔고 마지막으로 엉덩이에 주사를 맞았다.  


저녁도 못먹고 날 병원에 데려온 엄마와 아래에 있는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당당하게 주사를 맞은 기념으로, 엄마의 허기를 고려해 햄버거 네고를 친 셈. 역시, 인생은 협상이다. 라이스버거 광고 포스터가 아직까지 걸려있던 시기다. 아직까지 아이 감성이라 키즈 세트를 시키고 그 비닐 질감 나는 빨간색 의자에 앉아있었다.  


햄버거가 나오자 난 부리나케 달려가 영접했다. 너무나 행복하게 롯데리아 불고기버거를 영접해 모셔오는데, 어라 날 보는 시선이 다르다. 햄버거 때문인가? 싶었는데 그럴 리가. 주사를 맞은 내 오른쪽 볼기짝이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내 뒤에 줄서계신 어떤 아주머니가 “어머, 어머” 이러면서 나를 불러서 피에 젖은 태권도 도복을 움켜잡았다. 아르바이트생도 당황하고, 엄마도 당황하고, 그 아주머니도 당황하고, 심지어 그 아주머니의 아들내미도 당황했는데 정작 난 아무 생각 없이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말똥말똥하게 “대체 뭐가 문제야?” 라는 눈빛으로. 비행기에서 쉴 새 없이 음식을 주는 이유는 사람은 밥 먹을 때 가장 불만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주머니의 공조 작전으로 피가 줄줄 새는 오른쪽 볼기짝에 응급처치를 했다. 근처 약국에서 큰 대일 밴드를 사와 바로 붙였다.  


엉덩이에서 갑작스레 터진 피는 여름철 콧물 같다. 에어컨 발명가를 국부로 놓아야 한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더위 때문에 카페로 피신하면 내 코는 급격한 온도 차이에 적응하지 못한 나머지 콧물을 줄줄 흘린다. 내 코가 석자가 아니라 콧물의 방주다. 주르륵, 콧나기다.  


컨트롤 안 되는 이유는 당연하단다. 자연스러운 증상이란다. 내 의지대로 어찌할 수 없단다. 의지가 결여된 상황에 책임은 자유로워진다. 내 책임이 아니다. 에어컨이, 단군왕검이, 이승만이, 파리협약 탈퇴한 트럼프가 잘못한 걸로 치자. 


애를 키우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단다. 주사 맞은 엉덩이에서 피가 철철 나는 일도 그 중 하나다. 애기들이 울고 싸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죄가 없다. “난 쌀 거야”라고 미리 신호를 주었는데 알지 못하는 엄마와 아빠가 잘못이다. “제대로 안 챙기면 난 울 거야”라고 경고했는데 안 챙겨주는 부모와 세상이 잘못이다.  


얼레. 근데 부모도 억울하다. 애들이 울겠다고 신호준다는데, 대체 알 수가 없다. 걔네는 울음이 언어인데, 어른들의 사정이 가득한 세상 속에선 먹히지 않거든. 생활의 달인에 나올 정도로 몇십 년 내공이 쌓인 분이 아니라면 알지 못한다.  


미취학 아동이 엄마 손을 잡고 카페에 들락날락대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강동구에 살다보니 카페에서 아기들이 엄마를 보채는 모습이 익숙하다. 생각 많은 척하지만 별 생각 없는 나로선 여전히 별 생각이 없다. 애가 울고, 보채고, 좀 시끄럽게 굴어도 적당히 그러려니 한다. 말리지 못하고 쩔쩔 매는 부모를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쓰는 언어가 달라서 대화가 안되고 그러니까 달랠 수 없는 건데, 딱히 탓하고 싶지 않다.  


공공장소에서 뛰고 놀면 안된다는 에티켓은 우리에게만 너무나 당연하다. 자기 몸을 한껏 쓰고 싶고 마음껏 잡아 던지고 초고음으로 우는 게 본능인 그 나이대 애들에게 강제로 우리의 에티켓을 주입시킬 수 없다. 공공장소에서 남의 고막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고성을 지르고, 지하철이나 기차나 비행기에서 뛰어다니는 게 민폐일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겠냐. 서양식을 먹을 때 어떤 포크를 써야하는지 아직도 모르는 나랑 마찬가지다. 사회화가 덜 된 거다. 


적당히 엄마 자궁에서 사회화가 되어서 레디메이드 베이비로 태어나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사회화는 사람과 부대끼는 바깥 공간에서 일어난다. 혼나고, 칭찬받고, 때로 넘어지면서 말이다. 걷기 위해 수천, 수만, 수억 번을 넘어진다는데, 왜 우린 배우기 위해 그만큼 넘어지지도 못한 아이들을 내쫓기 위해 노키즈존을 만들까. 


물론, 아이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문제다.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책은 왜 금지와 배제일까. 노키즈존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그 아이들이 사회화될 공간은 점점 줄어든다. 그 이후엔 노올드존과 노흙수저존이 생기겠지. 결국은 엄격한 잣대를 지킬 수 있는 특정 계층만 남겨둔 공간이 되어버린다. 포용하고 도와주어야 할 사회가 금지와 배제하는 공간이 되는 순간.  


우리는 진공에서 살 수 없다. 이물질 하나 없는 증류수에서 물고기는 살 수 없다. 누군가를 이물질이라 규정하고 그들을 금지하고 배제하고 내쫓는 사회에서 남는 거라곤 없다. 그 사회에서 사는 재미? 당연히 없겠지. 우리는 진공에서 살기 어렵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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