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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Oct 01. 2018

[돌아보기] 미스핏츠 1.0 시절

마! 너네가 카드뉴스 전성기를 알아?

아주 초창기에 초창기로 돌아가면 멤버는 나를 포함해 총 4명이었다. 첫 글들의 소재는 '섹스'였다. 본인의 첫 경험이 어땠고 뭐가 좋았고 어쩌고 저쩌고. 지금에서야 성에 대해 다루는 글들이 범람하지만 (그때도 그랬지만), 그때는 지금보다는 덜 했다. 그 점에서 나름 희소 가치가 있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4명 중 한 명인 개씨라는 친구가 나가고, 추가 필진이 들어왔다. 강남역 카페에서 만났는데, 당시 편집장이던 친구의 지인으로 꾸려졌다. 이런 프로젝트라는 게 결국 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으로 꾸려지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누나들 세 명과 형이 들어왔다. 스터디를 같이 하거나 같이 수업을 들은 게 계기다.


당시 미스핏츠의 전략은 명백했다. 매일 카드뉴스를 만들고, 매일 글을 내보내자는 게 핵심이었다. 각 에디터는 일주일에 무조건 2개씩 글을 써야만 했고, 번갈아가며 카드뉴스의 스크립트와 디자인을 맡았다. 레퍼런스는 있었다. 카드뉴스로 흥한 UPWORTHY가 있었다. 글은, 레퍼런스가 없었지만 당시 페북이 정기적으로 무언가를 올리는 친구한테 알고리즘 우위를 줬다. 그래서 했다.


우리는 원격으로 일했다. 일주일에 2개를 원격으로 발제하고, 오케이되면 이걸 글로 썼다. 개수를 맞춰야 해서 웬만하면 모든 아이템이 오케이됐다. 대신 그만큼 열심히 썼다. 각 에디터가 각자 아이템으로 글을 쓰고, 이걸 구글 드라이브에서 피드백을 줬다. 다 오케이되면 발행하고.


이 과정에서 편집장의 역할이 주요했다. 전체 프로세스를 관장하고, 아이템을 쪼고, 카톡방에서 좋은 실마리가 나오면 바로 글을 쓰라고 부추겼다. 일주일에 한 명이 무조건 2개씩 글을 쓰게 된 데에는 그 편집장의 헌신이 있었다. 적어도 프로세스를 만들고 이를 돌리는 데엔 그 누구보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친구였다.


문제는 카드뉴스였다. 모든 에디터가 훌륭한 디자인 실력을 가지면 모르겠지만, 미스핏츠엔 구현모라는 지뢰가 있었다. 내 디자인은 너무나 참담하고 안타깝고 슬프기 그지없어서 '탬플릿'이 존재하지 않는 한 구제가 불가한 듯했다. 그런데 낫을 놓기 기역자인지도 모르는 놈이 구현모였다. 탬플릿을 주고, 디자인 툴을 알려줘도 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스크립트에 올인했다. 진영이랑 영서누나가 많이 봐준 듯하다.


직접 취재보다 2차 취재를 하는 친구들이라 포탈에서 뉴스를 그야말로 헌팅했다. 좋은 기사를 스토리로 만들고 시각적으로 구성하는 게 핵심이었다. 어떤 기사가 좋은 스토리성이 있는지는 우리 톡방이 검증했다. 카톡방에서 여러 기사를 공유하고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이거 어떠냐 등등 별의별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말이 끊이지 않는 톡방은 이야기거리와 아이디어의 보고였고, 좋은 카드뉴스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스핏츠는 잘되는 집이었다.


당시 기성 언론사와 미스핏츠의 관계는 묘했다. 경쟁자는 아니었다. 우리는 한겨레가 공유해준 거에 적잖이 신기해하고 뿌듯해했다. 지금보면, 한겨레가 공유해준 게 전혀 기쁜 일이거나 뿌듯할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적잖은 멤버가 언론고시를 생각하고 기자를 지망했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한겨레가 우리가 만든 카드뉴스를 공유해주고, 이게 우리 페이지 좋아요 상승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지금 언론사 페이지가 가진 힘이 별 거 없지만, 당시는 꽤나 강했다. 우리의 콘텐츠와 매체 성격 때문에 다양한 언론사에서 일해보지 않을래? 머 하나 같이 할래? 라는 연락은 꽤나 온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제안 내용은 그말싫. 언론사분들도 우리랑 어떻게 일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연락했기 때문에 제대로 일이 굴러가지 않았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876364&code=11171394


언론사와 협업이 원활하지 않았던 데에는 기자라는 직업의 특수성도 있다. 기자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적는 사람이지, 어떤 프로젝트를 외부와 함께 협업하거나 이걸 비즈니스로 만드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비즈니스에 대한 개념이 없는 크리에이터라고 해야 할까? 더군다나 우리에게 관심 있던 분들은 언론사 내에서도 뉴미디어에 관심 있는 소수였고 책임자는 아니었기에 더더욱 일처리가 불가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벌지 못했지만 일주일에 두 개의 글을 쓰고 카드뉴스를 매일 만들 수 있던 이유는 당시 구성원들의 기질이 독특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야기로 따봉을 버는 데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었고, 자신의 생각을 여러 가지(글, 카드뉴스)로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 모두가 초창기 프로세스를 만들고 직접 콘텐츠를 기획 및 제작했기 때문에 미스핏츠에 대해 "내가 한몫했다"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기효능감과 자아실현을 모두 할 수 있던 곳이다.


동시에 기존 관습에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이었고, 새로운 일을 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는 친구들이었다. 해볼까? 하면 그래, 해보지 뭐! 라는 사람들.


미스핏츠가 기존 언론사에게 크게 주목 받던 사건 중 하나는 바로 대자보였다. 아마 소담누나가 주동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누나를 비롯해 모든 구성원이 "해볼래?" 하자마자 "그래, 고"했고 그날 고대, 연대, 성대 등에 대자보를 붙였다. 추진력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41205_0013338805


아, 나는 그날 아파서 링겔 맞았다^^. 구현모는 숟가락 전문가임.


카드뉴스도 순항하고, 글도 어느 정도 흥하던 우리는 그렇게 대자보도 붙이고,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한다. 바로, 스토리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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