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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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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Oct 27. 2018

돈쓰기의 아름다움

돈 최고



어제는 집 가는 길에 동네를 산책했다. 맨날 다니던 길 대신에 다른 길로 갔다. 명일역에 내려서 천호역으로 걸었다. 죠스떡볶이 옆에 있던 카페 거북이 달린다는 닫았다. 아예 닫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초입인데 창문이 훤히 열려 있었다. 2층 창문으로 보이는 벽지는 뜯어졌다. 2016년까지 자주 가던 카페였는데, 닫은 걸 보니 황망했다. 


거북이 달린다를 지나 천호역을 향해 걸었다. 지나가는 길엔 있던 동네 슈퍼에서 400원짜리 서주 아이스크림바를 사먹었다. 옛날엔 아이스크림이 500원이었는데, 이젠 400원이다. 시간은 앞으로 흐르지만, 이 가격은 뒤로 흐른다. 바는 400원, 콘은 800원이다.  


음. 이 동네는 그런 맛이 있다. 도쿄나 힙한 동네 골목길처럼 무언가 세련된 맛은 없지만, 이 특유의 쌈마이함이 매력적이다. 화장실은 지저분하고, 건물 외벽은 구리고, 창문은 불투명한 색지가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뭔가 우리 동네 같다. 2마리에 12,900원 하던 순살 치킨 가격이 18,900원이 되는 동안에도 이 동네가 주는 특유의 편안함은 그대로다. 너무나 변하지 않아 지겨울 정도지만 여전한 맛이 있다.  


400원짜리 서주아이스크림을 먹고, U턴하면서 400원짜리 인절미 아이스크림을 또 사먹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니 추웠다. 추우니 카페에 갔다. 2015년엔 사진관이었던 곳이 이젠 카페가 됐다. 아니, 사진관도 같이 운영하는 카페가 됐다. 아버지뻘 되던 사장님은 안 보였다. 4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코코넛 쿠키도 하나 샀다.  


'내가 이만큼 소비했습니다’를 증명하는 사진을 몇 개 찍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본다는 친구의 톡에 CGV 앱을 열어 동네 극장 시간표를 봤다. 별 거리낌없이 통신사 포인트로 영화표를 예매했다. 3천 원 아끼려고 내일 조조로 볼까? 생각하던 찰나는 잊었다. 들어온 지 40분도 되지 않아 카페를 나섰다.  


돈쓰는 일은 아름답다. 이렇게 써봤자 2만 원이 되지 않지만, 돈을 쓸 때 채워지는 감각이 묘하게 짜릿하다. 서주 아이스크림의 달달함, 인절미 아이스크림의 쫀득함과 아메리카노의 뜨거운 맛까지. 보고 후회했지만 어쨌거나 창궐도 봤다.  


아주 에전엔 내 가족이 아플 때 걱정하지 않을 만큼 돈을 벌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게 벌고야 싶지만, 지금은 돈이 내 감각을 확장하고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도구라 생각한다. 돈을 쓰며 내 감각을 확장하고, 무언가를 채우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너무 좋았다.  


모든 소비는 체험이다. 체험은 경험이다. 그 경험은 내 자산이 된다. 밥벌이는 지겹지만 돈쓰는 일은 아름답다. 생각보다 난 돈 쓰는 일을 좋아하고, 돈을 많이 벌고 싶더라. 좋은 집에도 살아보고 싶고, 산펠레그리노도 박스 채로 사먹어 보고 싶고, 폰도 2년마다 바꿔보고 싶다. 보고 싶은 사람 보러 할증 택시도 거침없이 타보고 싶고 (운전 무섭), 새로 나오는 IT기기는 다 모아보고 싶다. 꼭두각시 서커스 만화책을 모아야 한다. 친구들이랑 작업실도 만들어야 한다. 돈이 내 능력이고 신분은 아니지만, 내 감각을 채우기 위해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동네는 변하지 않았지만, 난 아주 약간 변했다. 돈쓰는 일은 꽤나 아름답구나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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