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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Dec 26. 2018

공항은 외로워

슾루투 1일차

공항은 외롭다. 혼자 가든, 둘이 가든, 셋이 가든 면세점에서 공항 게이트까지 가는 길은 외롭다. 혼자 가는 장기여행이 오랜만이라 그럴까? 여름에 간 일본은 혼자였고, 마지막으로 간 장기여행인 남미는 여훈, 정재, 득호와 함께였다. 


떠나는 공간이라 그럴까. 누군가를 맞이하고 환대하는 따스함보다 누군가를 보내는 기운이 가득하다. 


출국을 기다리며 노트북을 열어 이러저러하게 논문을 고쳤다. 답도 없는 논문에 답을 내려고하니까 내 인생이 노답이 되는 느낌이다. 하느님, 아버지. 내 옆엔 한국인 여학생이 앉았다. 혼자 가는 여행이신 것 같았고, 비행기가 뜨기 전까지 가족과 전화하고 있었다. 서로 대화하진 않았다. 


이스탄불까지 가는 비행기에선 분노의 질주를 봤다. 이제와서 고백하건대 나는 더빙영화를 좋아한다. 혹자는 영어의 맛을 살리지 못한다고, 더빙이 저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더빙영화를 볼 때마다, 예전 어린 시절 TV앞에서 주말의 영화를 보던 (뜽 드드드등 드드드등 디리리~) 시절이 생각나 좋다. 모기장을 치고 판관 포청천과 토요미스테리 극장보던 기억도 아지랑이 피듯 피어난다. 


바르셀로나까지 가는 비행기에선 조선일보 김지수 기자가 쓴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읽었다. 김지수와 최보식 기자 기사는 매번 찾아 읽는다. 위인전 영상에는 없는, 살아오며 쌓은 삶의 주름을 켜켜이 글로 펴낸다. 책에 실린 인터뷰 중 태반은 이미 읽었다. 그래도 책으로 보는 맛이 따로 있다. 


희한하게도 철학자 김형석씨의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종교도 없고, 종교기관에 비판적이지만 그의 종교관에 약간 감화됐다. 성실하고, 겸손하라는 것. 그래, 겸손해야 한다. 여행할 때마다 느낀다. 난 여행지의 빈민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 그러니까 누구는 지금의 생계 때문에 치열하게 땀을 흘릴 때 난 여행에서 한가롭게 글을 끼적일 수 있는 이유에 운이 적지 않게 작용한다. 이 운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도 실력이지만, 이 운에 감사한 게 먼저다. 운도 실력이라지만, 실력으로 쌓을 수 없는 운이 태반이다. 행운에 감사하는 만큼 불운도 감수해야 하는 게 함정. 


그렇게 온 바르셀로나는 더웠다. 초겨울 코트를 입고 왔는데도 더웠다. 낮에는 초가을, 밤에는 늦가을 날씨인 듯하다. 카탈루냐 광장 지하철역에선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다. 주머니를 스치는 느낌이 들어 코트를 확인해보니 노트가 빠져있었다. 얼른 달려가서 눈짓을 주니 'VAMOS!'라면서 다시 돌려준다. 크리스마스에 나쁜 짓하니까 노트를 가져간 거로 치자.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외국에 갈 때마다, 서울에 감탄하게 된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시에서 동아시아, 아니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가 된 건 정말 대단하다. 흔히들 말하는 '서구화'에 유럽은 없다. 유럽의 시민의식과 치안은 한국만도 못한 경우가 많은 듯하다. 서울, 정말 편한 도시다. 상식이 우리와 다르다라고 해야 할까. 한국의 상식은 일본과 더 닮은 듯하다. 그래, 서구화에 유럽은 없다. 미국화다. 


쓸쓸한 여행길에 함께하는 건 노트다. 3장을 가득 채웠는데, 첫장은 외로움이고 두번째장은 감사 그리고 세번째장은 걱정이 담겨있다. 브런치에, 인스타에, 노트에. 여행을 활자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가득 남길 것 같다. 


바르셀로나에서 자동차 기름냄새를 맡으니, 남미가 기억난다. 여훈, 정재, 득호와 하릴없이 볼리비아와 칠레를 걸었다. 사진도, 영상도 없지만 기름냄새를 맡으니 그때가 기억난다. 사진과 영상으로 여행을 더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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