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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Mar 01. 2019

<옥자, 집으로 가는 길.>

옥자, 원 오브 봉준호 유니버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애처로운 희망을 안고 끝납니다. <괴물>은 가족이 없던 이에게 안식처를 주고, 가족을 잃은 이의 상처를 어루만집니다. <설국열차>는 닫혀있던 문을 열고, 죽어있던 세상에게 생명을 주죠. <마더>는 좀 다르지만, 살풀이 춤이라는 것이 본디 '해소'의 역할을 하기에 갈등이 해소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옥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옥자의 주 플롯은 옥자와 미자의 관계입니다. 옥자와 미자의 관계가 위기에 빠지고,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둘의 관계는 이쁩니다. 미자는 옥자를 보살피고, 옥자 역시 미자를 위해 희생하죠. 마치 부모의 관계와 같은데, 친구처럼 웃고 떠들고 노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관계는 강원도에서 이루어집니다. 강원도를 벗어난 서울과 뉴욕에서 옥자와 미자는 각기 다른 곤경에 빠집니다. 넘어지고, 긁히고, 구릅니다. 서로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상처를 핥아주는 것뿐입니다.


영화는 강원도에서 시작해, 강원도에서 끝납니다. 한강에서 시작해 한강에서 끝난 괴물과 유사합니다. 엔딩 장면의 구성도 비슷합니다. 상처를 딛고 새롭게 가족을 꾸린 괴물과 같이, 옥자와 미자 역시 새로운 가족을 꾸립니다. 새로운 새끼를 데려온다는 점에서, 오히려 괴물보다 희망적입니다. 엔딩의 형식은 괴물과 유사하나, 내용은 설국열차와 비슷합니다.


삶은 타협의 연속


사실 옥자와 미자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착하기만 하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착함과 나쁨을 명확하게 구분하던 어린 시절과 달리, 현재 우리가 그저 "그 사람도 상황이 있겠지"라며 이해하고 넘어가는 거랑 비슷하네요. 동물을 자유롭게 만들자는 ALF 사람들은 옥자와 미자를 이용합니다. ALF의 뜻을 위해 옥자를 강제 수태가 예상되는 지하실에 넣죠. 심지어, 미자의 말을 왜곡해 본인들 입맛에 맞게 해석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ALF의 행동대장이 '어쩔 수 없다'면서 작전을 그대로 시행한 걸 보면, 사실 다 거기서 거기인 셈이죠.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루시 미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니와 아버지로 인한 콤플렉스로 인해 항상 인정받고 싶어 하죠. 본인이 이룬 회사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미자를 이용합니다. 옥자를 도축하려고 한 낸시 역시 착함과 나쁨 없이 지극히 자본의 논리에 맞춰 삽니다. 금돼지 하나로 인해 방금 전까지 개무시하던 미자를 본인의 고객으로 인정하고, 아무런 불편 없이 집으로 보내라고 이야기하죠. 비용과 편익으로 모든 것을 대한다는 점에서 다소 불편할 수는 있지만, 이를 선악으로 평가하기는 애매합니다. 그들은 그저 순간순간, 현실과 타협하면서 선과 악의 경계를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넘나듭니다.


오프닝과 엔딩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서 옥자와 미자는 고통받고, 현실과 타협합니다. 서울역에서 난동을 부리며 졸지에 '괴물'이 된 옥자와, 단지 옥자를 보고 싶은 것이 다인데 온갖 이해관계자들에게 사용되는 미자입니다. 옥자와 미자는 이러한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 받고 타협하는 중간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바로 제이크 질렌할입니다. 제이크 질렌할은 TV에 출연하는 유명한 수의사인 '조니 윌콕스'를 연기합니다. 이 캐릭터는 틸다 스윈튼이 열연한 설국열차의 '메이슨'과 같은 위치인 듯합니다. 메이슨의 손동작과 캐릭터가 설국열차에서 다양한 상징으로 쓰인 것처럼, 조니 윌콕스 역시 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다들 그렇게 어른이 된다


강원도에서 시작된 관계가 서울과 뉴욕 등에서 고통받고, 그 상처를 지닌 채 강원도에서 마무리되는 과정은 순수한 어린이가 성장하면서 현실의 풍파를 견디고, 성장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건 성인의 출근 혹은 직장생활과 유사합니다. 


집에서 출근을 하고 (태어남) 직장에서 각기 다른 상처를 얻고 (고통 및 성장) 퇴근하는 (상처를 지닌 채 휴식 or 어루만짐) 우리네 모습과 같습니다. 고향과 집이 출발을 위한 공간이자, 상처 받은 이를 어루만져주기 위한 공간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옥자의 강원도는 우리네 집과 유사합니다. 서울과 뉴욕은 사회이자 직장일 수 있고요.


순수했던 사회 초년생 시절에서, 풍파를 겪고 어른들의 세상에 젖어들어 그 논리를 모두 흡수한 우리네와도 같죠.



조니 윌콕스의 생애는 저 출근 그 자체입니다. 순수한 동물 애호가에서 시작해, 동물을 공장에서 도축해 파는 회사의 상징이 되고, 변한 본인의 모습에 역겨워하고 반성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변한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이 흡사 상처를 지닌 새로운 가족을 껴안은 옥자-미자와 닮았습니다.

이 조니 윌콕스와 가장 닮은 사람이 미자입니다. 옥자와 강원도에서 살고 싶단 순수한 꿈을 가진 미자는, 추후 공장에서 낸시 미란도와 '금돼지'로 옥자를 협상합니다. 영화 초반부, 돈으로 상징되는 속세에 전혀 미련이 없던 미자와는 약간 다릅니다. 돈이 전부인 낸시에겐, 돈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거죠.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겁니다.


옥자, 가장 순수했던


옥자는 크리쳐 영화도, 가족 영화도 아닌 우리네 모습을 그린 다소 코미디적 요소가 있는 잔잔한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옥자는 집에서 출발해,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침을 탄생으로, 저녁을 새로운 탄생을 위한 휴식이자 죽음으로 생각한다면 영화 옥자는 우리의 하루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옥자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타협하고, 상처 받고, 스스로를 어루만지는 우리네 삶과 같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가끔 신세한탄을 듣습니다. 본인이 무엇을 바라고 이 회사에 들어갔는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는지, 과거의 자신이 그린 모습과 현재가 얼마나 다른지, 행복하고 순수했던 과거의 동그라미에 비해 본인이 얼마나 모났는지 등을 이야기합니다. 끽해야 20대인 친구들도 느끼니, 저보다 선배분들은 얼마나 더 많이 느끼실까요.

영화 옥자는 우리네 삶을 둘러싼 많은 풍경을 보여줍니다. 감각이 있는 동물들도 무자비하게 처리하는 어두운 공장식 축산의 모습, 회사를 위해 일하라고 하지만 정작 4대 보험은 받지도 못하는 청년의 모습, 낭만적이지만 이루고 싶었던, 이상적 꿈을 가진 청년에서 꿈을 잃어버린 중년이 된 우리네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죠.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이를 위로하고, 상처를 어루만져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옥자가 우리네 삶을 상징한다면, 영화 내내 미자가 부르는 옥자는 결국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성 혹은 과거의 어떠한 열망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 오늘 하루 고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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