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 우상은 우상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상을 지닌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세 개의 축으로 떠받듭니다. 명회, 중식, 연화라는 세 축은 각자의 우상을 지녔고, 누군가의 우상이기도 합니다.
명회는 우상입니다. 한의사 출신으로 준수한 외모와 정의로운 이미지로 경남도지사 유력 후보죠. 도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도지사 대리보다 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데에는 그만의 드라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명회는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한의사계의 아웃사이더로 여러 굴곡을 거쳤습니다. 티비방송으로 인기를 얻어 중앙정치까지 노리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땅바닥에서 올라온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올라온 그의 상승욕이 추진력이자 그의 지배자입니다.
명회는 가장 우매한 우상입니다. 우매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영화 내 모든 사건의 원흉이 명회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명회의 아들이 뺑소니를 내고 달아나는 사건에서 출발하는데요, 만약 명회가 집에 돌아온 아들을 보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면 모든 사건은 종결됐을 겁니다.
하지만, 명회는 본인이 여태까지 이루어온 업적이, 그의 드라마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해 바로 신고하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폐차하고, 모든 흔적을 깨끗하게 지운 이후 아들을 자수시킵니다. 사건을 덮고자 저질렀지만 궁극적으로 이 사건이 그를 파국으로 몰아넣습니다.
명회는 우상에 미친 우상입니다. 수많은 유권자에겐 우상이지만, 그 역시 권력이라는 우상을 쫓고 있죠. 영화에서 명회는 자살시도를 한 아들이 죽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모든 사건이 묻히기 때문이죠. 본인의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가 죽길 바랄 정도로 본인의 우상을 맹목적으로 쫓고 있습니다.
명회의 지지자들에게 명회는 모든 것을 통달한 우상처럼 보일 겁니다. 지지자들은 명회를 예수처럼 받드니까요. 하지만 그는 모든 것에 통달한 우상이 아니라 본인의 우상에 미친 나머지 입으로 거짓을 내뱉는, 과욕에 빠진 필부에 불과합니다. 본인이 이루어낸 업적, 아래에서 위까지 계층을 상승시킨 그 추진력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충돌한 사람입니다.
가끔 우리는 우상을 그 자체로 신성시하고, 떠받듭니다. 너무나 믿은 나머지 그의 업적과 영향력이 그의 진심인 것처럼 받아들이죠. 하지만 영화는 이런 우상을 신성시하는 사람들을 비뚤게 바라봅니다. 실제로 중식의 누나는 자신의 조카를 죽게 한 범인의 아버지인 명회를 ‘의원님’이라 떠받들고 모십니다. 그리고 그의 사과를 진심이라고 철석같이 믿죠.
어쩌면 감독은 우상의 진심은 현재의 위치와 그곳에서의 언행이 아니라 그를 그 자리까지 가게 한 원동력과 욕망이 진심 아니겠냐는 냉소적 시각을 지닌 게 아닐까 싶습니다.
중식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아버지입니다. 그의 아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대신 자위를 해주고, 생계를 책임져주죠. 그 사랑은 모든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원동력입니다.
중식은 아들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고, 임신한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합니다. 무당을 만나 ‘가장 높은 자의 목을 쳐라’라는 계시도 받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자식 사랑에 미친 순진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 역시 자신의 후계자를 우상으로 두는 추종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우상이 사라지자 파멸한 사람이고요.
그는 부남이라는 본질을 우상으로 두지 않고, 후계자라는 형식을 우상으로 둡니다. 극 중에서 중식은 연화가 가진 아이가 부남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앳 저녁부터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아들의 정관 수술을 시켰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련화가 자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전심전력으로 그 아이를 되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심지어 중식은 자신의 아들을 화장시키고, 명회의 선거팀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련화의 한국 체류를 돕습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 며느리였던 련화를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지만 아내로 받아들이면서까지요
련화를 위한 것이냐고요? 아닙니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살인 현장에서 중식은 련화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지 않고, 련화 뱃속의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에 좌절합니다. 집으로 찾아온 련화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좌절하죠.
앞서 중식은 한국에서 제일 높은 자의 목을 쳐야만 아들이 돌아온다는 무당의 계시를 받습니다. 하지만 당장 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후계자마저 죽은 사실을 알자, 새로운 후계자가 나타나길 바라며 목을 치죠. 실제 친아들이 죽고 련화를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펼칠 때도 하지 않던 짓을, 자신의 피붙이도 아닌 형식적 후계자가 죽자마자 저지릅니다. 그만큼 중식은 본인의 대를 잇는 데에 열심이었고, 본인의 후계를 우상으로 두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그 우상이 사라지자마자 우상을 잃은 팬들이 방황하듯 모든 것을 놓고 자포자기한 거고요.
연화는 명회와 중식과 닮았습니다. 첩의 자식으로 가족공동체에 뿌리를 두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국 한의학계의 이방인으로 떠돌던 명회와 닮았습니다. 안정이라는 본인의 우상을 좇으며 별의별 짓을 저지르는 모습은 전국을 돌아다니고 이순신 동상의 목을 터트리는 중식과 닮았고요.
연화는 첩의 자식이라는 근본적 한계로 인해 항상 불안한 삶을 삽니다. 그만큼 뿌리를 두고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살인도 저지르고, 불법 업소에서 일하고, 한때 시아버지였던 사람과 결혼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안정은 그녀의 우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의 우상이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폭주합니다. 곧바로 본인에게 상처를 준 명회의 어머니를 죽이고, 명회와 명회의 아내와 함께 자폭하죠.
영화는 무엇이 연화가 우상과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트리거였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외적 자극이 아닌 내적 자극이 그녀의 트리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중국에서 온 청부업자와의 조우 이후에, 본인이 평생 안정된 삶을 살 수 없다고 자각하지 않았을까요? 마치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이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다는 사실에 눈물 흘렸다는 대사처럼요.
명회가 우상의 이면을 보여주고, 중식이 헛된 우상을 쫓는 사람의 추락을 보여주었다면 연화는 우상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정이라는 우상과 만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자마자 련화는 모든 것을 놓은 채로 자폭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우상을 가집니다. 돈, 명예, 연인 등 각자의 우상을 좇죠. 하지만, 그 우상을 절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일 겁니다. 누군가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만, 하늘이 무너진 마당에 솟아나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금수저를 이길 수 없고, 키가 180이 될 수 없다는 사실만큼 처절하게 슬픈 일이 없습니다.
그 점에서 련화는 마치 태양 가까이 갔다가 추락하는 이카루스처럼 인간이 지닌 한계를 보여주는, 가장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영화 우상의 세 축을 맡은 배우는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한석규 배우가 가장 빛납니다. 우상을 쫓다가 추락하고, 본인의 아들마저 죽는 상상을 하는 욕망에 미친 사나이를 잘 보여줍니다. 설경구 배우와 천우희 배우도 좋고요.
그러나 대본과 연출이 아쉽습니다. 근본적으로 이야기에 초점이 흐립니다.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명회의 추락과 재기를 그립니다. 이 점에서 명회가 영화의 메인 플롯이고, 중식과 련화는 메인 플롯이 진행되는 와중에 밝혀지는 일종의 서브플롯인 셈입니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자 서브플롯이 메인 플롯을 잡아먹습니다. 가뜩이나 동시에 세 가지의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나머지 두 이야기의 힘이 커져서 중심축인 명회의 이야기가 묻힙니다. 더군다나 서브플롯에 다양한 맥거핀이 들어가서 관객의 호기심마저 서브플롯을 향합니다. 결국, 영화를 끌어가야 할 명회의 이야기가 쩌리가 됩니다.
맥거핀의 향연이었던 곡성 같은 경우, 결과적으로 하나의 메인 플롯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뚜렷합니다. 결과적으로 곡성의 맥거핀은 ‘이래도 말이 되고, 저래도 말이 되는’ 다양한 결말의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우상의 맥거핀은 ‘이래도 말이 안 되고, 저래도 말이 안 되는’ 혼파망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운드를 혹평하셨습니다.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실제로 천우희 배우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조선족 말투로 빠르게 대사를 진행하다 보니 발음이 뭉개집니다. 다만 내용 전개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 인물들이 각자의 우상에 가려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을 보여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상은 참 인간적인 영화입니다. 그래서 불편하고, 그래서 좋기도 합니다. 우상 없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나약한 인간을 그려냈고, 우상 앞에서 생각을 멈추고 하염없이 그를 따르는 우매한 인간도 담았습니다. 영화는 중반으로 진행될수록 약간 지루해지지만, 생각할 구석은 더욱 많아집니다.
영화를 보면, 현실이 그려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는 중식의 대사가 실존은 없고 허울뿐인 우상에 빠진 우리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