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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May 20. 2019

아따, 슴슴하이 좋네. 여기 맛집이네

MBC 예능 <가시나들>을 보고

고백하건대, 내가 여전히 보는 TV 콘텐츠는 무한도전 하나밖에 없다. 


푹의 무한도전 라이브 채널이 내가 TV 콘텐츠를 보는 유일한 경로다. 복면가왕은 지루하고 대탈출은 산만하다. 미운우리새끼는 재미가 없고,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TV 예능은 촌스럽게 질질 끌거나, 너무 지루하거나, 진부했다. 리듬이 빠른 와썹맨마저 가끔 스킵하면서 보는 내게 TV 예능은 너무나 먼 놈이었다. 모든 때깔은 넷플릭스에, 리듬은 유튜브에 맞추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영상이 없었다.  


어라, 근데 이거 다르다. 


넷플릭스 때깔에, 리듬감도 좋다. 유튜브로 보는 브이로그 감성도 있고, 리틀 포레스트도 숨겨져 있다. 오프닝에 적혀있는 손글씨와 바스락대는 마이크 소음마저 미장센으로 느껴진다. 바로, <가시나들>이다.  


콘셉트만 보면 그저 그런 예능처럼 보인다. 한글을 배우지 못한 할머니들이 연예인과 함께 한글을 배운다는 콘셉트는 자칫 잘못하면 그 예전의 공익 예능으로 빠지기 쉽다. 혹은 할머니들의 인생을 소재로 지루한 감성팔이가 되어 자칫 배우지 못한 불쌍한 할머니로 소진할 수도 있다. 좌회전을 해도, 우회전을 해도 욕먹기 십상이다.  



이런 우려는 단숨에 날아간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수준의 좋은 때깔이 단숨에 사로잡는다. 인트로에서 아무런 브금 없이 자작 시를 읊는 할머니와 그 옆에 나오는 손글씨 한 방에 “아, 이건 좀 다르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감탄이 끝나자마자 도리스 데이의 ‘Que Sera Sera’가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작은 소녀였을 때 어머니에게 내가 무엇이 될까 물었다는 가사는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할머니들의 모습과 딱 어울린다. 이러니 몰입할 수밖에 없다. 빠른 화면 전환, 동시에 쏟아지는 CG, 눈이 돌아가지 않게 꽉 잡아주는 자막은 없다. 단지 때깔과 배경음악 하나로 모든 관심을 사로잡는다. 


존중 순도 100%


무언가를 배우는 콘텐츠는 쉽게 사람을 희화화하기 마련이다. 무언가를 어설프게 아는 모습을 유희거리로 만드는 것이 학습 예능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싶기 마련이다. 할머니들은 한글을 모르시고, 할머니의 학습 메이트 출연자 중에서도 한글을 어설프게 아는 친구들이 많다. 

하지만, 놀리지 않는다. 오히려 존중한다. 위키미키의 유정은 최유정으로, 이달의 소녀의 이브는 그냥 이브로 나온다. 평생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였을 가시나들은 소판순씨, 김점금씨, 박승자 씨, 박무순 씨, 이남순씨로 불린다. 소판순씨의 어설픈 글씨와 박승자 씨의 꼬부랑글씨를 비웃지 않는다. 그저 그대로 보여준다. 출연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만큼 그들에 대한 존중이 꽉 차있다.  



편집도 독특하다. 마이크 소음마저 효과음으로 들린다. 초반 10분은 효과음이 절제되어있다. 출연자 옷깃에 달려있는 마이크에 옷이 비벼지는 소리와 출연자들의 대화가 전부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내겐 이 마이크 비벼지는 소리가 마치 ASMR처럼 들렸다. 마치 화이트 노이즈처럼 오히려 출연자의 대화에 몰입됐다. 



영상 후반부에 나오는 음식상을 드는 장면도 좋았다. 보통 예능이면 최대한 이쁘게 잡기 위해 수직으로 한 번 찍거나, 클로즈업해서 찍었을 장면을 그저 멀리서 보여준다. 마치 SBS 스페셜이나 KBS 다큐에서 나올 법한 장면을 예능에서 보니 신기했다. 다른 예능이었으면 다소 어색했을 법한 이 장면은 프로그램 콘셉트와 전체 편집 리듬에 비춰보면 오히려 어울렸고, 마치 리틀 포레스트처럼 따뜻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출연자에게 애교를 강요하지 않고, 할머니를 ~~ 댁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여태껏 불리지 않은, 그들이 가진 이름으로 부르며 그들의 시작을 응원한다. 화려한 장기자랑 타임도 없고, 어쭙잖은 힐링도 없다. 남들이 보면 ‘자연주의 예능’이라거나 ‘무공해 예능’이라 불릴 만큼 독특한 감성을 살려내기 위해 색감과 음악에 들인 공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슴슴하이, 좋다


촌스럽게 표현하면 사람 냄새나고, 할머니들 말로 하면 참 슴슴하다. 약간 싱겁다고 느껴질 만큼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리듬감은 여전하고 색감은 뛰어나다.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라는 소재가 가진 울림도 살아있다. 15분도 버티지 못해 스킵하던 내가, 다이내믹한 대탈출마저 답답해 스킵하던 내가 지하철에서 60분 동안 집중해서 봤다.  



가끔 좋은 콘텐츠가 무엇일까 궁금한다. 단순히 시청자의 의견을 담아내서 소통을 이뤄낸다고 해서 좋은 콘텐츠는 아닐 테다. 좋은 뜻을 담았다고 해서 좋은 콘텐츠는 아닐 테다. 고민의 끝은 이야기로 이어졌다. 시청자가 고민할 법한 이야기, 시청자가 공감할 법한 이야기, 시청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이쁘고 정갈하게 담아내는 것이 콘텐츠의 본질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가시나는 누구나 공감하고 감동할 만한 소재를, 그 소재가 가진 울림을 누구나 부담 없고 재밌게 볼 수 있게끔 녹여낸 정말 좋은 콘텐츠다.  


아, 슴슴하이 좋다. 여기, 맛집이다.  


- 1화 MVP는 이달의 소녀, 이브. 꼭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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