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은 날씨가 썩 좋았다. 낮에는 진짜 무지하게 더웠는데,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니까 선선했다. 급 산책이 땡겨 무작정 나갔다. 걷다보니 고등학교 앞이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 맞은편엔 주택가가 있다. 그 주택가엔 청록색 배경에 노란색 글씨로 '명일이발관', '꼬꼬헤어샆' 이 새겨져 있는 촌스러운 간판이 보인다. 내 24시간에 전혀 보이지 않던 철물점이 여기엔 있다. 놀이터도 있고, 그렇다.
근처에 대로가 있어 우범지역은 아니지만, 주택가는 어둡다. 그래서 고등학교 땐 특정 길목으로만 다녔다. 주택가 사이에 골목길로 다니지 않은 이유는 가보지 않은 길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저 골목길로 가면 길을 잃을 것 같았고, 집에 가지 못할 것 같고, 학원에 늦을 것만 같았다. 그냥 무서웠기 때문일까.
아주 오래된 기억이 있다. 몇 년 전에 결혼한 사촌 누나가 초등학생일 때, 그러니까 나는 아마 초등학교 1학년일 적에 친할머니 집 근처에서 길을 잃었다.
비디오가 시발점이었다. 하릴없는 설날을 재밌게 보내는 유일한 방법은 비디오대여였다. 젝스키스 은지원이 출연한 '세븐틴'이 보고 싶었지만 실패했고 다른 비디오를 빌려나왔다. 사촌 누나와 그걸 보고, 다시 반납하러 나갔다. 반납은 쉬웠다. 되돌아오는 길이 문제였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되는데, 내 되도 않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저 길로 가도 돼"라며 누나를 끌고 다른 길로 나섰다. 내 머리 속에 그려진 맵핵에선 이쯤 오면 할머니 집이 나와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고장난 나침반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결국 패배를 인정했다. 아, 길을 잃었구나.
사촌 누나도 울었고, 나는 울기보다 쪽팔려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결국 우리를 구출하러 아빠가 출동했다. 할머니집과 불과 50미터 거리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고작 1블럭 차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길을 찾지 못해서 방황했다는 패배감이 조금 더 커졌다. 아, 바로 앞이었는데!
그때부터였나. 왠지 가지 않은 길은 잘 안가기 시작했다. 어줍잖은 모범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을 잘 듣는 일뿐이다. 그래서 안갔다. 묘한 객기가 충만해지는 여행지를 빼고서 막 새로운 길을 찾는 편도 아니다.
오늘은 왜 그랬을까. 왠지 모르게 가지 않은 길로 동네를 탐험했다. 고등학교 때 한 번도 가지 않은 골목길도 가보고, 그냥 발이 닿는 대로 거닐었다. 저기도 어차피 강동구고, 어차피 고덕 / 명일동이니까, 어차피 크게 다른 건 없고 난 이미 다 겪어봤어! 라는 패기와 뭔일있겠냐 라는 객기 그리고 우리 동네는 다 알고 있어 라는 자신만만함이 더해졌다.
가끔,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두려울 때가 있다. 연애, 일, 우정, 관계 모두. 우리는 모두 내일을 산 적이 없지만, 어제와 오늘을 살았다. 그래서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하고 있고, 대충은 알고 있고, 꽤나 많이 예측하고 있다. 그래서 누구는 내일 더 재밌는 일이 많이 벌어지길 바란다. 예측불가한.
살아보지 못한 내일도 뻔뻔히 받아들이는 내가 뭐가 그리 무서워서 그 골목길은 가지 않은 걸까.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두려워할까. 그동안 수많은 골목길을 걸어봤고, 많은 일을 해봤는데 말이야.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냥 굳건하게 걸어보고, 뻔뻔하게 내일을 맞으면 되는 것 같다.
선선한 바람. 그 바람이 트리거였고 용기의 시발점이었다. 그 바람이 톡 밀어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