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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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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l 03. 2019

역겨움이 솟구칠 때



좋은 곳엔 좋은 사람만 있다. 


아니, 좋은 곳엔 좋게 태어나서 좋게 자란 사람만 있다.  


그게 참 희한한데, 좋은 직장엔 좋은 친구들만 있다. 서울에서 자라서, 중산층 집안(이라고 착각하지만 상위에 가까운) 에서 자라고 적당히 유학을 하거나 교환학생을 갔다온 친구들 말이다. 국내 유수 대기업 신입사원의 스펙을 까면, 아니 부모의 자산을 까면 장담컨대 상위 30%가 태반일 거다.  


사람들이 로스쿨만을 갖고 그러지만, 로스쿨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로스쿨, 의대, 대기업, 공무원 등. 소위 말해 좋고 안정된 직장엔 좋고 안정된 직장을 가진 부모의 자식들이 올라가고, 그렇게 대물림된다. 좋은 직장 신입사원들 줄을 세우면 흙수저는 거의 없다. 진짜 극소수.  


누구는 서울에 사는 서민이라고 말하지만, 서울 가구 평균 재산이 5억이고, 중위값은 2억 7천이다. 뭐로 봐도 전국보다 약 50%가량 높은 수치다. 그러니까, 서울에 어찌 됐든 집 주소를 달고 산 3~4인 가구는 전국 평균보다 웬만하면 잘 사는 사람일 확률이 농후하다.  


서울에 사는 게 권력이냐 묻지만, 적어도 메리트는 있다. 혹자는 모든 교육이 인터넷으로 되는 시대에 뭔 말이겠냐고 묻겠지만 아직까지 공부엔 ‘오프라인’과 ‘네트워크’의 힘이 강력하다. 기술이 훨씬 발전한 미국에서도 주요 도시 위주로 혁신이든 뭐든 일어나고 있는데 지방에 디메리트가 없겠냐.  


어찌 됐든 인서울 대학에 들어가, 아둥바둥 공부를 해서 그럴싸한 직장에 들어가도 느끼는 건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다. 그리고 그 벽의 이름은 어쩔 땐 수저고, 부모고, 자산이다.  


월급 300가량을 가지고 결혼을 하겠냐고 말하는 사람이나, 월급 300이 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기만자다. 1인 가구 중위소득이 170만 원, 3인 가구 중위 소득이 376만 원인 시대에 초봉이 300가량 되는 대기업은 모로봐도 좋은 곳이고, 잘 사는 사람들이다.  


눈높이가 상위 30%로 되니, 결과물도 상위 30%가 된다. 기사에서 반영되는 인터뷰이의 샘플은 한국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는가. 1년 365일 동안 발행되는 헤드라인 기사에 인터뷰이를 줄세우면 태반은 서울일 거다.  


여튼, 이런 생각을 하면 역겨움이 솟구친다. 돈을 많이 벌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좋은 직장을 꿈꾸는데, 그 직장에 들어가고자 하는 경쟁자와 출발점이 다르다. 애초에 다르다. 근본이 다르다. 들어와보니, 근본이 다른 애들이 너무 많다는 좌절감에 휩싸인다. 내가 이렇게 아둥바둥 살아봤자, 저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겠다는 그 묘한 패배감에 목구멍으로 적잖은 울음을 삼킨다.  


근데, 이걸 더 크게 보면 더 역겹다. 국내 대학이나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녀를 유학보낸다. 진보와 보수는 상관없다. 차별하지 말자는 사람들은 뒤에서 어디 대학 출신이냐 물어본다. 학력으로 차별하지 말자고 하지만, 여전히 고졸과 중졸에 대한 차별의식은 매한가지다.  


좀 오버해서 말하면, 안정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안정된 직장을 갖고, 안정된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패배감이 20대 전반에 깔려있지 않나 싶다. 반값등록금을 외치고, 안녕들 하십니까를 외치다가 블라인드 채용을 겪는다. 근데 그래봤자 만나는 신입사원과 동기들은 세고 센 집안에서 태어난 잘나디 잘난 애들.  


좋은 기회를 갖추려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야 한다. 아니, 안정된 집안에서 태어나야 한다. 어른들이 말하는 결혼의 최소조건, 결혼의 최소비용과 평균비용 기사를 볼 때마다 암담하다. 집안에 모아둔 돈 천만 원이 없는 상황인데 친구는 결혼할 때 부모님이 도와주지 않겠어? 라고 말한다. 씁쓸하게 다시 한 번 침을 삼킨다.  


역시 결혼은 이제 잘 사는 사람이 하는 거구나. 그래, 그게 서로 편하지. 잘 사는 사람이 결혼해서 많이 낳는 게 편해.  


현실에 대한 타협일까 염세일까.  


내가 약자라고 목놓는 글도 아니고, 억울하다고 외치는 말도 아니다.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진절머리 날 때가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야 하냐고 되묻는 진보 어른들도 싫고, 연세대에서 토익 900 넘게 딴 자기 자식을 보고 용기를 얻으라는 여당 대표도 싫다. 1) 연대에 들어가는 것과 2) 토익 900의 교집합이라. 잘 사는 집안이겠지. 잘사는 집안의 잘난 아들을 보고 용기를 얻으라는 새끼 진짜 죽이고 싶더라.  


좋은 무언가를 얻으려면, 좋은 혈통이어야 한다는 이런 ㅈ같은 결론. 그냥 난 이 결론이 싫은데, 이 결론이 싫다고 하면 나이브하다, 세상을 모른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는 냉소적인 비웃음만 받을 것 같아서 싫다.  


이 결론에 해답이 있느냐, 그럼 타개책이 뭐냐고 묻는 말에 할 말이야 없지만 ㅈ같은 건 ㅈ같은 거다. 좋은 혈통을 가지지 못한, 좋은 수저를 가지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이 사회의 세이프존에 들어갈 자격도 되지 못하는 걸까. 그럴 확률은 있는 걸까. 패배감과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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