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현모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현모 Aug 08. 2019

여행이라는 씻김굿

여행의 이유를 읽고



여행과 장례식에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우린 장례식장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끼리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은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갔다가 오면 삶의 욕구가 충만해진다.  


변태 같겠지만, 장례식장에 갔다 오는 길엔 항상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떠나보내는 사람에 대한 추모와 별개로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에 무의식적으로 감사하게 되는 걸까.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1분 1초를 낭비하면 안 되는 묘한 강박.  


여행도 그렇다. 난 여행에 가면 매초, 매분, 매일을 기록한다. 언제 생긴 강박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기록한다. 사진, 영상, 글, 녹음까지. 그렇게 적다가 보면 ‘서울에 가면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 모든 여행 기록은 기승전 버킷리스트다.  


여행의 이유에선 여행을 일상의 부재라고 묘사한다. 자신이 무언가 지켜야 할 규칙적 생활이 없는 곳에서 일탈을 즐기고, 문제를 해결하며 (외국어로 주문한다든지) 희열을 느끼는 과정이 여행이라고 보는 듯하다.  


낯선 곳에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생활하며 생활형 과업을 해결하는 일은 멀고도 가까운 이웃처럼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29살 어른이가 7살 애새끼가 된다. 자아를 가진 상태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유아가 되어 여행을 통해 레벨업을 하는 과정은 야성이 거세된 도시인들에게 남은 퀘스트가 아니려나. 옛날 옛적부터 내려온 영웅 서사가 여행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  


일상을 씻으면서 무엇이 달라질까. 어제의 나? 뭐, 당연히 그렇지만 물론 과거의 나와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기존의 내가 가진 문제점과 한계를 좀 더 명확하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때문에 조금은 나아진다. 물론 서울에서도 같은 일은 가능하나 물리적으로 내가 일상을 구축한 공간과 멀어지면서 더 심사숙고하고 객관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근시안적 사고를 지우고 멀찍이 나를 관찰할 수 있는 시간.  


물론, 도피의 기능도 있다. 책에 나오듯 우리네 일상은 상처와 고통의 연속이다. 우리네 일상에 쓰라린 말들이 일상적으로 많을 때, 우린 여행을 꿈꾼다. 혹자는 일회용 도피가 아니냐고 하지만, 상처가 너무 쓰라릴 땐 일단 찬물을 부어야 한다. 쓰라린 말들이 너무 많을 때  


물론 이 말고도 순기능은 많다.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서비스를 즐기거나, 한국보다 발전한 다양한 소비재 + 서비스업을 즐기는 일은 항상 즐겁다. 문화마다 다른 디테일들 (신호등 모양이라든지)을 관찰하는 일은 내 여행의 취미다.  


책 자체는 그저 그랬다. 사실 초반이 너무 재밌어서 후반이 너무 지루했다. 과거 대학생 시절 여행 관련 에피소드를 풀던 초반에 비해 카프카적 어쩌고로 여행을 비유하는 후반은 긴장감이 떨어진다. 몰입력이 부족하다.  


물론 이 사람의 사고는 매력적이다. 세상에 평범한 회사원이란 없다든지, 평범함 속에 다름을 캐릭터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야 역시 이 사람 소설가 맞는구나”라며 끄덕이게 만들더라.  


예전엔 여행이라는 단어에 반감이 들었다. 사실 여행이야말로 10대의 누군가가 빈부격차를 가장 많이 느끼는 소재기 때문. 가족 외식, 가족사진, 가족여행은 사실상 화목한 가정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의 상징이다. 그래서 내게 여행은 어릴 때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재수 없는 장치였다. 아직까지도 가족여행을 딱히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저거 때문일 수도.  


보지 못한 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힌다는 여행의 기초적 기능을 고려할 때, 빈부격차, 여행 경험, 소득격차는 상관관계가 있는 변수들 아닐까. 10대의 여행이 20대의 여행보다 충격이 크듯, 어릴 때 들어간 자극이 훨씬 세기 마련이고 웬만하면 긍정적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아 그래서 뭐냐면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번호가……  


독서모임 말미에 사회적 멀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상과 현실이 다를 때 느끼는 어지러움 말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생각해보면, 탄핵 이후의 동력이 너무나 빠르게 소진된 게 아닌가 싶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정치적 구호가 문자 그대로 정치적 구호로만 끝나버렸고 현실은 외교든 뭐든 부정적 이슈밖에 없다. 사회를 바꾸자는 이야기보다 너도 같이 죽어보자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단 생각이 많이 드는데, 마치 지구의 자전이 멈춘 영화 코어가 생각날 정도.  


이렇게 멈춘 세상에 사람들은 열패감에 빠지거나, 사회에 관심 없이 자기에 빠지거나, 혹은 냉소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냉소적 토양에서 자라난 10대들은 어떻게 될까. 미국이 8090년대에 겪은 문제를 어쩌면 우린 10년 뒤에 겪을 수도. 생각해보면 우린 한 번도 너바나 같은 자살충동 가수를 만나지 못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이 인터넷으로 갈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