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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n 01. 2016

<인물읽기> - 허셜 in Walking Dead

인식은 변화의 시작.

워킹데드엔 매력있는 캐릭터가 많다. 가는 곳마다 파괴와 새드 엔딩을 부르는 걸어다니는 아포칼립스인 릭, 츤데레이자 전투력과 판단력 모두 상급인 데릭, 김치맨의 생존력을 보여주는 글렌, 하드캐리머신이자 흑막인 캐럴까지. 비인간적이자 동시에 인간적인 캐릭터가 참 많다. 미국식 시즌제 드라마의 장점은, 한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리는 데에 참으로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중 요즘 눈에 띈 캐릭터는 바로 허셜이다. 나무위키를 뒤져보니 영화 <괴물>에서 한강에 독극물을 푸는 흑막이란다.



시즌 2에 나오는 허셜은 꽤나 소심하고 숨기는 게 많다. 총에 맞아 부상당한 칼을 치료해주지만, 릭 일행이 자신의 농장에서 얼른 떠나가주길 바란다. 의뭉스럽게 릭을 바라보며, 숨기는 게 많아보인다. 항상 릭그룹을 멀리서 바라본다.



아니나 다를까, 허셜은 농장에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그 비밀은 농장에서 워커들을 사육하고 있었다는 점. 워커를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해, 자신의 와이프와 농장 근처에서 잡힌 워커들, 심지어 릭 일행의 소피아마저 농장에 가두어 사육했다. 


왜 그랬을까. 항상 냉철한 판단력을 보여주었던 허셜이다.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 그였다. 워킹데드 추후 시즌을 보면 '현자' 소리를 들을 만큼 황금 판단력을 보였던 그다. 왜 그가, 워커를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보고 사육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꽤나 잦은 오류를 범한다. 그 오류가 집중될 때는 바로 내 가까운 사람이나, 내가 그 문제에 얽혔을 때다. 허셜의 와이프는 워커가 됐고, 허셜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 제 3자의 일에선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으나 그 숫자가 1이 되면 즉, 그 사람이 '내'가 되면 판단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워킹데드의 현인인 허셜 역시 인간이다. 그의 판단력은 떨어졌다. 


그를 몽상에서 현실로 깨워준 사람은 역설적으로 그가 내쫓고자 했던 '릭'이었다. 그의 현실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인물이, 그의 현실을 일깨웠다. 불편한 진실은 항상 바깥 사람이 일깨워준다.


현실로 돌아온 허셜은, 그러니까 문제를 직시한 허셜은 180도 달라진다. 살을 뺀 빅뱅의 탑처럼, 스타1으로 돌아온 김택용처럼 날카로운 판단력을 보여준다. 아내를 잃고 환상에 시달리던, 총을 버리고 돼지를 키우는 농부가 되고자 했던 릭에게 조언을 한다. 글렌을 말리고, 타이리스 그룹을 받아들인다. 워커가 치료불가능함을 깨닫자, 생존을 위한 최선의 방안을 고안하고 실행한다. 실제로 허셜은 거버너에게 죽기 직전까지, 그룹의 리더이자 현자이자 행동가였다.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문제를 회피하거나 왜곡하기 십상이다. 특히 그 문제가 우리와 직접적 이해관계에 얽혀있으면 더더욱 그럴 확률이 높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를 자신의 문제로 해석하지 않았고, 남성들은 강남역 사건에서 젠더권력이 엮였음을 외면했다. 구의역 사건에서 철도노조는 전관 예우 문제를 빼놓고 말했다. 대기업은 해외의 사례를 들며 노조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비정상적 지배구조를 빼놓았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첫번째 발걸음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일이다. 워커가 못 고치는 병임을 알면서 허셜은 외면했다. 그 끝은 참혹했다. 워커는 늘어났고, 사육은 불가했다. 솔직히 인정하자. 허셜이 지키고자 했던 무언가는, 허셜의 생존을 위해서 가장 먼저 부서져야 했다. 


한국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엔 복잡다단한 모순들이 얽혀있고 그 모순은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하지만 모순을 해결하고자하는 사람들은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제껴둔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하거나, 문제를 선의로 포장하거나, 아예 이야기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엔 노동이 없다. 노동은 꿈과 끼, 창의성으로 포장되고 인적자원은 인재라는 단어로 그럴 듯하게 나온다.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일엔 정규직화만 있지, 철피아가 없고, 전관예우가 없다. 전관예우 변호사문제엔 악의 축인 전관만 있지, 그걸 받아주는 현관은 없다. 강남역 사건에 조응한 성차별과 혐오엔 혐오하는 소수만 있다. 젠더 권력은 없고, 권력 관계에서 강자가 되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우리는 없다. 10대니까, 성문제니까 덮어두자는 어른들은 결국 돈이 없어서 생리대를 못 사는 아이들이 말도 못하게끔 만들었다. 


양성평등시대라고? 여성의 노동참여율은 2013년 기준으로, OECD 평균에 미치지도 못한다. 같은 일을 해도 여성이 덜 받는다. 우리나라가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왜 하냐고? 그럼 어떡하냐 현실인걸. 당신의 믿음은 중요하지 않다. 현실이 중요하다. 현실의 문제를 바꾸기 위해선, 문제적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아이가 그럴 리 없다고? 애들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을걸.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냐, 아이들은 그런 걸 배우기엔 너무 어리다,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 


정말 지겨운 이야기다. 우리, 톡 까놓고 이야기하자. 문제는 항상 존재한다. 문제는 문제아만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인간은 동물이다. 동물을 인간으로 만드는 좋은 방법은 제도와 교육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제도와 교육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제도와 교육의 대상자는 타인이 아니라 우리다. 


우리는 문제적이다. 우리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구조를 이루고, 구조가 우리를 이룬다. 항상 인지하자. 이해한다. 불편한 진실이다. 하지만 어떡하냐. 이게 현실인데. 


없다고, 알면 안된다고, 가린다고 해결되거나 가려지는 문제는 세상에 없다. 간단한 이치다. 염증을 가리면 곪는다. 세균을 가리면 곪는다. 햇볕에 두어야 한다. 인식, 직시, 직면 모두 해결의 첫번째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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