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죽어간다. 이 글자를 타이핑할 때도 전 세계에서 많은 이가 죽어간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을 때도 참 많은 이가 죽어간다.
혹자는 죽음이 공평하다고 한다. 세상 모두에게 다가오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중이 없어야 한다는 생명에도 실상 차별이 있듯 어떤 죽음은 차별적이다.
김용균은 머리를 안에 넣고 일해야 하는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머리가 으깨져 사망했다. 지겨운 밥벌이를 해내던 어느 30대 노동자는 10톤 블록에 깔려 죽었다. 지난주 현대중공업 공장에선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이 탱크 제작을 하다가 헤드에 깔려 사망했다. 그는 기중기로 헤드를 들어내는 2시간 동안 그렇게 깔려 있었다.
죽음이 차별적이듯, 밥벌이도 차별적이다. 누구도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5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아무도 안전을 강조하지 않는다. 좋은 기업만, 좋은 일자리에 있는 사람만,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윗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6톤의 쓰레기를 바다에 버리고 의전을 하는 동안 그 누구도 하층 노동자의 안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불공정사회에서 죽음은 불공평하다. 태어날 때부터 크레인과 멀리 살 수밖에 없는, 불공정 경쟁에서 항상 승자의 위치에 있는 그들은 이런 죽음을 모른다. 그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나, 갖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천대한다. 천대받는 일을 하다 죽는 사람은 억울할 권리도 없다. 그저 그가 배우지 못하고, 노력하지 않았고, 그런 환경에서 "자기 몸을 지키지 못해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런 죽음을 볼 때마다 사회에 가득 찬 이 소음의 허무함을 느낀다. 4차산업혁명이 무엇이고, 공산주의가 무엇이고, 평화가 무엇이고, 개혁이 무엇이고, 변화는 무엇일까.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하루의 밥벌이를 채우려는 이들을 도와주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는 사회는 무슨 사회란 말인가. 그런 사회에 내가 몸담고 있고, 이곳에서 내가 갖고 있는 운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현기증이 난다.
어느 작가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라고 한다. 이 시스템은 이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유죄로 만드는 톱니바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