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는 단 한 번도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선지자도 아니었다. 환상인지 질 나쁜 농담인지 모를 상황 속에서 아서 플렉은 남들이 자기를 치켜세우는 상황을 즐겼을 뿐이다. 그저 자신을 괴롭히는 질나쁜 놈들을 총으로 죽였는데 자신이 혁명가의 상징이 된 그 상황을 즐겼을뿐이다.
극중에서 그는 자신의 행동에 단 한 번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영화 조커를 본 몇몇 평론가는 조커가 거짓선지자라거나, 자신의 악행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지만, 영화 끝까지 그는 본인의 행동에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막바지 머레이쇼에서 내뿜는 그의 외침은 세계사적 - 역사적 의미라기보단 자신이 어떠한 멸시를 받았는지에 대한 외침일뿐이다.
조커 속 머레이는 조커를 비웃지만, 정작 조커가 한 행동에 대해선 농담도 아니고, 웃기지도 않는다고 한다. 물론 살인은 악행이지만, TV에서 대놓고 아서 플렉을 조롱거리로 만든 그가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위선 아닌가.
영화는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슬럼가에서 공교육 바깥에 있는 학생들 - 아마 이민자 2~3세가 아니려나 - 이 갱스터가 되는 과정. 대중을 기만하는 정치인, 사회 보장 시스템을 '게으른 사람'을 위한 시스템이라며 비용을 줄이려는 사람들까지.
혹자는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서 플렉이 구체적으로 핍박받던 상황은 대개 구조가 만들었다. 혹자는 구조가 만들어낸 폭력을 왜 개인에게 발현하냐고 묻지만, 인간은 지극히 감정적이고 위기에 처한 사람일수록 그 구조에 대한 이해보단 그저 내 눈 앞에 떨어진 상황에 분노하기 마련이다.
-
유머는 개인적이지만 지극히 사회적인 것이라, 그 사회에 쌓여있는 상식 토대가 크게 좌우한다. 쉽게 말해, 미국식 유머와 한국식 유머가 다르며 1990년대 한국식 유머와 2000년대 한국식 유머가 다르단 뜻이다. 그 점에서 그 사회의 유머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 문화적 코드가 통하는 일원이라는 증거다.
조커는 남과 다르다. 남들이 웃는 상황에서 웃지 않는다. 남들이 웃지 않는 상황에서 웃는다. 타인과 유머 코드가 다르다. 즉, 극중 아서 플렉은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릴 만한,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누릴 만한 보편적 환경과 코드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게 사회에 보편적이지 않은, 구석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회가 어떻게 대했는지 영화 속에서 자주 보인다. 비를 맞으며 힘겹게 올라가도 그 끝엔 맑은 하늘이 아니라 시궁창 같은 아파트밖에 없다. 구세주 같던 정치인은 자신의 얼굴을 치고.
조커는 여전히 엄청난 영화라고 생각하고, 한국에 기생충이 있으면 미국에 조커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메시지는 너무나 뻔하고, 오히려 그 정교한 짜임새는 기생충에 비하면 못하지만 호아킨 피닉스 연기 하나만으로도 그냥...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폭력을 옹호한다거나, 단순히 폭력을 조장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영화 속 아서 플렉은 안타까운 친구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을 옹호할 만한 장치는 별로 없거든.
조커에 대한 옹호보단 그에 대해 위선적 잣대를 들이대던 수많은 이들을 엿먹이는 부조리극 정도? 솔직히 머레이 그렇게 갈 때 시원하긴 했음. 재수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