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 시즌이라 적잖은 사람이 내게 지금 회사 면접 후기를 묻는다. 필요할 땐 그 친구들의 자기소개서도 봐준다. 지원동기, 특기, 최선을 다한 기억 등 자기소개서의 질문은 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그 안의 내용만 다를 뿐이다.
그 친구들의 자기소개서를 읽다 보면, 새삼 나의 지원동기를 반추하게 된다. 나는 무슨 꿈을 가졌었고, 무엇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까 고민한다. 돈, 꿈, 비전, 성취, 성장 등 여러 거창한 단어가 떠오른다. 허투루 쓰인 단어를 다 지우고 나면 행복과 꿈만 남는다. 그리고 지금 내 모습과 비교하게 된다.
그래, 우리 모두 행복하기 위해 취업을 했다. 행복이라는 추상명사를 성취하기 위해 취업이라는 일반명사를 해냈다. 그 관문을 지난 사람은 행복할까? 우리는, 아니, 나는 행복한가?
행복하기 위해 회사에 왔고, 타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불행한 경우가 많다. 불행감을 넘어 우는 사람도 많다. 워라밸은 없어져서 회사가 집이 되고, 건강이 없어져서 만성피로에 찌들고, 미소가 없어져서 무표정인 사람들이다. 성장과 커리어라는 무엇인지 모를 신기루를 쫓아 스스로가 불씨가 되어 지금을 태우는 사람들이다. 프로의식을 앞세우며 자신을 넘어 타인의 행복마저 짓밟는 사람들이다.
행복하기 위해 회사에 와서 일을 한다. 그 회사에서 타인의 웃게 만드는 일을 한다. 행복하기 위해 들어왔고, 웃음을 파는데 정작 본인은 울고 있다. 클라이언트를 뿌듯하게 만들고, 출연자를 만족시키고, 시청자를 타인을 웃게 만들기 위해 일을 한다.
그 눈물과 고통 앞에서 혹자는 말한다. 이런 일을 하면 당연히 감내해야 하고, 네가 택한 길이니까 조금의 신음소리도 내면 안된다고 말이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공감하기보다 조소 짓고, 위로하기보다 다그친다. 날카로운 발톱도 없고, 강대한 근력도 없어 자연적으로 협업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동물이 인간이다. 협동하고 함께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사이코패스로 진화한 인간들 앞에서 나는 헛웃음이 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업계만의 일은 아닐 테다. 가족의 웃는 얼굴을 위해 일하지만 본인은 울고, 꿈을 이루는 내일을 위해 지금 펑펑 우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 동네에, 이 서울에, 어쩌면 이 세계에.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하는데, 왜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은 걸까. 내가 행복의 범위를 너무나 좁게 정의 내린 걸까? 일하는 우리는 스스로 성장에 미쳐 가족을 등한시하는 빌런이 되거나, 스스로를 너무나 불태워 몸과 마음이 모두 너덜너덜해져야 하는 걸까. 영웅으로 죽거나, 버텨서 악당이 되어라 하비 덴트의 말처럼 우리는 악당이 되어야 하는 걸까. 은퇴 후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우울감에 빠지기 쉽다는데, 왜 노동하는 인간마저 우울하기 쉬운 걸까.
자기소개서를 봐주다 보면, 친구들은 취업 관문을 통과한 나를 부러워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겸연쩍게 웃는다. 예전보다 편하게 책을 사고, 밥을 먹지만 여전히 내 행복의 온도는 그 수준이다. 욕심의 문제일까.
오늘도 행복을 판다. 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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