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도, 사랑도, 이터널 선샤인도, 아님 말고.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여기, 우리 모두가 겪어본 꽁트가 하나 있다. 구현모는 어젯밤 기쁜 마음으로 치킨을 시켜 먹는다. 그다음 날, 한숨을 쉬며 후회한다. 어제 기쁘게 먹은 치킨이 오늘의 살이 됐기 때문이다.
오늘은 수많은 어제로 이루어져 있다. 어제 쌓아둔 칼로리가 오늘의 체력이 되어 지금을 살게 하듯, 과거는 삶의 굳은살이 되어 오늘을 지탱한다. 물론, 오늘도 어제를 재해석한다. 그렇게 달콤하고 맛있던 치킨을 살로 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먹지 말았어야 할 악마의 유혹으로 여기듯 말이다.
사랑도 비슷하다. 누군가와 사랑한 기억은 종종 족쇄로 남는다. 열병과 같은 첫사랑과 첫 이별로 인해 지금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한 기억은 나만의 전유물이 아닐 테다. 기억을 넘어선 왜곡이 족쇄를 더욱 강하게 채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간사하게도 헤어진 이유를 잊고 사랑한 사실만 남겨둔다.
그리고 그 기억을 아련하게 왜곡한다. 상대방을 떠나게 만든 나쁜 성격은 고치지 않고 블로그를 훔쳐보고, 상대방의 바람은 까먹고 결혼 소식에 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그리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간 연인의 나쁜 모습만 기억하거나, 아예 지우려고 한다. 최소한의 방어본능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 기억 지우기에 대한 영화다. 인터뷰에 따르면, 카우프만과 공드리의 합작은 이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아픈 기억을 지우면, 사람들은 진짜 행복할까?”라는 간단하고도 심오한 질문. 극 중 망각이 축복이라는 니체의 말을 빌리는 기억 지우기 회사의 직원이 이 걸작의 모티브인 셈이다.
기억을 지우면, 반복하게 된다.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극 중에서 기억을 지우지 않은 박사와 그의 부인은 다시금 불행해지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을 완벽하게 지운 매리는 불행의 고리에 빠진다. 이는 메인 커플인 조엘과 클레멘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만나기로 할 때 클레멘타인의 머리칼은 행복했던 시절의 붉은 머리가 아니다. 그녀의 머리색은 우울을 상징하는 푸른색이다.
사랑한 시절에 대한 기억이 핵심이다. 극 중에서 주인공들은 사랑했던 기억을 지우고자 한다. 어떻게 사랑에 빠졌고, 왜 헤어졌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랑했던 순간이 그들을 아프게 하기에 지우고자 한다. 하지만 그 지우고자 한 기억은 다시 사랑하게 만든다. 지우고자 한 붉은 머리의 클레멘타인이 연인으로 징검다리가 되듯 말이다. 헤어지고 나면 의미 없다고 치부되는 그 시간들은 우리 삶에 나이테처럼 켜켜이 남아 지워지지 않는 사랑이 된다. 우리를 슬픈 사랑의 오발탄으로 만드는 방아쇠가 된다.
이 영화는 인간과 사랑에 대한 운명론을 담았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처럼 인간은 기억하면, 그 기억에 얽매인다. 하지만 매리처럼 기억을 지워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그 기억을 평생 짊어지고 사는 수밖에 없고 그 기억은 족쇄가 되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기억을 지워도 다시 사랑하게 되는 조엘과 클레멘타인, 기억을 지워도 박사에게 충동을 느끼는 매리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랑은 운명과 같아서 피할 수 없다. 사랑은 가까이서 보면 행복한 기억이라 희극이다. 하지만 언젠가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숙명과 이별 후에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비극이다.
사랑은 그 사람의 이름으로 된 역사를 품는 일이다. 역사는 시간의 세월로 묵직하기에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빼려고 할수록 더 깊이 박히는 가시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순간의 아드레날린은 지워지지 않을 상흔으로 남기에 빚지는 장사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사랑하는 존재라는 원죄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결국, 사랑은 피할 수도 없고, 지워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맛있게 먹어도 치킨은 0칼로리가 아니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