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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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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Oct 25. 2019

신발이 터졌다.


왼발 에어 뒷부분이 찢어졌다. 왼발을 내딛고 땅을 디디면 푸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왼쪽 발뒤꿈치는 더 이상 에어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푹신해야 할 뒤꿈치 부분은 누군가의 한숨처럼 푹 꺼지는 소리만 난다.


알고 있었지만 쭉 신고 있었다. 버리지 못했다. 전 직장을 그만두기 직전에 사고, 나와 함께 스페인과 포르투 여행을 다니고, 제주도와 상암까지 다녀온 이 신발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애착이 생겼다. 고작 왼쪽 발 뒤꿈치 에어 하나 찢어졌다고 버리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애정이다. 


신발을 버리라는 나와 신발을 버리면 안 된다는 내가 싸운다. 어차피 수리도 못하는 신발을 갖고 있어 봤자 짐밖에 더 되냐며, 네가 닮기 싫어하는 아빠처럼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거냐며 독촉한다. 버리지 말라는 나는 말한다. 왼쪽 발뒤꿈치 하나 찢어졌다고, 신발 전체를 버릴 거냐며 묻는다. 핸드폰은 느려지면 느려진 대로 쓰면서, 티셔츠가 늘어나면 그냥 그대로 입으면서, 신발은 걸을 때마다 약간의 바람소리가 들리는 게 전부인데 버릴 거냐며 말이다. 그동안 함께 한 신발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냐며. 


280mm의 신발에 작은 구멍이 하나 생겼다고, 전체를 버리기는 쉽지 않다. 쓸데없이 감상적이라 어처구니없는 부분에 정을 주는 나로선 더 그렇다. 마치 떠나간 누군가를 쉬이 잊지 못하는 내 모습과 같다. 같이 쌓아왔던 기억이 산더미만큼 있는데, 더 이상 예전의 - 친구 내지 연인으로 정의된 - 관계가 아니라며 무심하게 버리고 지우기엔 내 성격이 그렇지 못하다. 무심하지 못해서, 무심코 지울 만한 용기가 없다. 


내가 가진 기억은, 이 신발과 같다. 그거 하나 터졌다고 버리지 못한다. 나는, 이 신발과 같다. 그거 하나 터졌기에,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기에 쉬이 버리고, 버려진다. 


때때로 생각한다. 기억이란, 관계가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닐까. 말이다. 그렇게 사랑하고, 애정 하고, 달콤했던 기억도 예전의 정의 내린 모습이 아니면 추하고 부끄럽다고 치부한다. 그렇게 사랑했던 이마저 똥차로 묘사하고, 그토록 가까웠던 이도 손절이라는 동사의 목적어로 만들어버린다. 함께 한 기억은 같이 손절 대상이 된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내 뭔지 모를 욕망이 투영된 것인지, 이 신발을 쉬이 버릴 수 없다. 쉬이 버려지지 않는다. 오늘도 난 누군가의 꿈을 꿀 테고, 그때 우리가 가진 관계의 모양을, 마음의 모양을 그리워할 듯하다. 


왼쪽 신발엔 구멍이 뚫려서 바람 소리가 난다. 아마 내 마음에도 같은 모양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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