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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an 25. 2020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여러 층의 이야기를 하자.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 이후, 남자들 사이에서 유령이 태어났다. 무고죄라는 유령 말이다. 성범죄 대비 고작 0.8%의 기소율에 불과하지만 남자들은 무고죄를 겁내며 적지 않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오히려 물음표를 씌웠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 그 사람이 ‘진짜’ 피해자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시작했다. 


강간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됐다. 아니, 원래 강간은 그랬다. 여자가 꼬리를 쳤다거나 꼬시다 실패해 앙심에 저질렀다고들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나쁜 범죄자가 저지르거나 꽃뱀이 저지르는 범죄였다. 이 범주에서 피해자는 잔혹한 남성에게 당한 순수한 피해자 여성이거나 못된 꽃뱀에게 속은 순진한 남성이었다. 결국, 조금이라도 순수하지 않은 여성은 피해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남성이 스스로를 꽃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순진한 남성에 이입했다. 앞서 말했듯 무고죄 기소율은 고작 0.8%에 불과하다. 100건의 무고죄 고소가 있으면 84건은 증거 불충분 등으로 불기소에 들어가고 15건은 무죄다. 결국 1건만 무고다. 피해자의 진술 중 명백한 허위나 객관적 사실에 반하는 증거가 있어야 무고죄로 기소가 된다. 실상 피해자의 주장이 거짓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증명이다.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 번째로 왜 몇몇 남성들은 무고죄에 대한 공포심에 벌벌 떨며 스스로를 순진하고 무고한 남성에 이입하는가. 성범죄 재판이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대다수 성범죄는 권력형 범죄다. 이 권력형 범죄를 드러내고 징벌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이 갖고 있는 권력은 해체되기 마련이다. 남성이라는 물리적 공통점을 기반으로 남성들은 권력형 범죄자에 이입한다. 가난한 자들이 보수 정권을 지지하고 과거 백인들이 흑인을 막연히 두려워하듯, 권력이 없는 남성들도 이에 이입해 해당 재판을 두려워한다. 본인들이 누려온 일상과 권력이 해체되지 않을까 하는 근본 없는 두려움이다. 


근본 없는 두려움을 갖는 이유는 그만큼 현실에 대한 인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를 두고 공포 정치를 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민자에 대한 혐오로 먹고 살아온 유럽 내 특정 보수 언론과 마찬가지다. 이런 공포 정치는 필연적으로 반동을 불러일으킨다. 소위 ‘이남자’와 ‘남성 혐오’를 말하는 사람들이 이런 반동에 조응한다. 


두 번째 의문은 왜 우린 항상 순수한 피해자를 바라냐는 것이다. ‘바라냐’라는 서술어가 과격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피해자가 순수하지 않거나 과거에 나쁜 행적을 저질렀으면 졸지에 ‘그런 짓을 당해도 싼 사람’ 등으로 격하시켜 버린다. 이런 행태를 고려하면 우린 분명히 피해자에게 순수함을 바란다.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필연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없는 현상에 나름의 이유를 붙이고 자신의 논리대로 이해하고자 한다. 피해자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피해자가 순결하지 않다는 사실로 그 범죄를 당한 이유로 간주하고 본인과 구별 짓는다. 이 과정에서 인지적 스트레스가 감소하고 자신이 존재하는 세상이 안전하다고 여겨진다. 즉, 피해자는 범죄를 당할 이유가 있었고 나는 범죄를 당할 이유가 없으니 내가 있는 세상은 안전하다는 논리적 귀결이다. 가해자 대신 피해자에게 이유를 붙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쉬우니까. 


마리는 위와 같은 뒤틀린 인식의 피해자인 동시에 부재한 전문성과 부족한 직업윤리의 피해자다. 만약, 마리의 사건을 맡은 수사관이 성범죄에 대해 보다 높은 전문성을 쌓았고 피해자를 배려한다는 직업윤리를 준수했다면 마리는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았을 테다. 직업인은 일을 하다 보면 본인의 경험에 근거해 모든 일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딱 보니까 저 사람이 범죄자라거나 딱 보니까 여자애가 꼬리를 쳤다 실패했네 등의 근거 없는 추론 말이다. 마리 담당 수사관이 피해자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의 피해자성을 의심했기 때문에 위의 비과학적 추론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불성실한 직업윤리의 문제다. 


이 사건이 비교적 최근인 2010년대의 일이기 때문에 지금이라고 더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떻게 수사를 개선하고 잘못된 인식을 고칠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전문성에 대한 함양은 기관 내 교육으로 제고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해당 직업인만의 노력으로 나아지지 않는다. 해당 직업 커뮤니티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인식이 선행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릇된 인식을 올바르게 꾸짖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필요하다. 


하루 이틀로 해결되는 일은 아니다. 당연히 쉽지도 않다. 하지만 그동안 쌓아온 그릇된 Rape culture (강간 문화 - 해외에서 나온 단어라 영어로 표기함)를 하루 이틀에 해결하고자 하는 심보도 참 나쁜 심보다. 그나마 희망은 축적보다 해체가 쉽다는 점, 하나가 아닐까 싶다. 


기타 메모 거리 


  

     학자는 지식과 윤리를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 때때로 A라는 주장이 특정 사람들에게 그릇된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렇기에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를 붙이며 윤리를 강조해야 한다    


     소위 ‘객관적 사실’이 나오는 토양을 의심해야 한다. 데이터 산출물을 넘어 데이터를 뽑아내는 과정과 토양을 의심해야 한다. 그릇되거나 왜곡된 통계로 뽑아내는 주장은 뿌리부터 글러먹은 셈. 실증분석을 할 때 항상 맥락과 편향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인과에 대한 발언은 조심해야 한다.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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