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현모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현모 Jan 25. 2020

삶의 무늬

밀레니얼이라는 단어 많이 팔아먹었지만, 자주 허망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소소한 삶의 여러 결정의 기준은 내 가치관뿐만이 아니라 내 지갑이다. 결국, 우리네는 한정된 예산 안에서 내 선호에 맞는 선택을 내린다. 내 선호보다, 예산이 먼저다.


내가 먹고 마시는 음식들을 하나씩 열거한다. 냉동식품, 국밥, 돈가스, 떡볶이, 라멘, 초밥 등등. 내가 입는 옷을 읊는다. 스파오, 에잇 세컨즈, 유니클로, 종종 무신사 할인. 내가 사는 곳을 바라본다. 서울시 은평구. 전세금 1.5억 이내에서 청년 대출이 가능한 곳.


의식주 하나하나에 내 지갑의, 가족의, 직장의, 계급의 무늬가 드러난다. 주제에 맞는 삶이 어디 있겠냐만, 내 계급에 맞는 삶의 모양은 있다. 여기까지 허락되고, 저기까지는 넘볼 수 없는 그런 삶의 경계선을 종종 느낀다.

밀레니얼, 젠지. 다 좋은 단어다. 하지만 그 좋은 단어가 나부낄 때마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낀다. 그 좋은 포장지 뒤에 우리네 치열한 삶은 결국 계급과 직장이 만들어낸다. 입으로 밀레니얼, 녹색, 다양성을 말하지만 결국 내 비천한 삶의 토기는 직장과 계급이 빚어낸다.


산업재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겪는 산업재해는 그 사람의 원죄가 아니다. 단지 그가 그것으로 밥벌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죄인이 있다면, 그가 위험한 일자리에서 일하게끔 만든 그의 계급 내지 계층일 테다. 결국, 이 역시 그의 삶이 드리워진 무늬일 뿐이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다양하고 멋진 삶의 이야기들을 마주한다. 아이러니하게 그곳에 노동의 이야기는 없다. 외래어와 그럴싸한 문장으로,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상품은 삶의 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아니, 그럴 것도 없고.


밀레니얼이라는 산타는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기울어져야 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