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현모 Jun 05. 2016

<인물읽기> 종구 in 곡성

필부의 침묵은, 또다른 필부의 죽음이다.

근 몇 년간 가장 화제가 된 한국영화는 단언코 <곡성>이다. 스릴러 장르인 주제에, 이렇게 대중성과 화제성을 동시에 잡은 영화가 있을까. 나홍진 감독은 <추적자>, <황해>에 이어 세번째 스릴러를 선보였고 가장 호평을 받고 있다.


<곡성>에 대한 해석은 갖가지다. 아마 각자 서있는 위치, 보는 풍경에 따라 해석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재밌는 영화일 거다. 해석에 대한 정의는 차치하고, 영화 속 인물을 통해 영화를 보자.


영화 제목 <곡성>의 곡성은, 피해자가 내지르는 단발마다. 하지만 영화의 단발마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영화에서 악에 씌인 사람이나, 악에 씌인 사람에게 죽는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영화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종구의 아내거나, 종구다. 크게 포함해봤자 악에 씌인 사람이 죽는 걸 보는 간호사와 의사들까지다. 


종구를 보자. 종구는 비명지르는 사람이다. 나홍진 감독은 관객과의 GV를 통해, <곡성>을 생존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영화라 말한다. "괜찮아,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최선을 다해도 안 된다는 게 운명이다 라는 게 진짜 메시지 아닐까 싶다)". 대체 이런 영화로 왜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으나, 그럼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생존자이자 남은 사람인 '종구'는 이런 위로를 들어도 괜찮은 사람인가? 종구는 착하고, 죄가 없는, 그러니까 그저 미끼를 물기만 한 사람인, 그저 악이 내 옆집에 산 게 죄의 전부인, 그런 사람일까?


종구는 외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곡성은 내 나와바리여". 실제로 종구의 직업은 동네를 지키는 경찰이며, 오랫동안 곡성에 살아왔는지 모든 마을 사람들과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다. 즉, 그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경찰)과 개인적 정체성(토박이)이 결부된 상태다.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나와바리여

하지만 그는 그만큼 성실했는가? 아니다. 오프닝 씬에 나오는 종구는 '자신의 나와바리'에서 중대한 '살인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식사'를 핑계로 늦게 도착한다. 도착한 종구는 자신의 직업 소명을 뒤로 한 채, 도시에서 온 형사들에게 일을 맡긴다. 현장을 대충 훑어보고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고 담배 한 대를 핀다. 

그는 놀랄뿐이다

추후에 자살하는 인물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 이 파출소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종구는 친한 동생이자 부하인 친구에게 그 사람을 떠맡긴다(물론 무서워서 둘 다 처리하지 않는다). 불이 난 집에서도 같다. 종구는 장모 핑계를 대며 현장에 늦게 도착하고, 피해자를 두려워 해 그녀를 제압하지도 못한다. 공권력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서도 공권력을 대동하지 않는다. 그저 그와 그의 후배 순경과 함께 사건을 수사한다. 일에 성실하지도 않고, 제대로 수사하지도 않는 종구가 적극적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제복을 벗으면서다. 


그렇게 게으르던 종구였지만, 그 불행이 '나'의 일이 되자 적극적으로 변한다. 제복을 벗으면서 공적인 일에 대한 책무를 포기하고 -실제로 딸에게 사건이 일어난 후, 종구는 출근조차 안한다-, 가족사에 매달린다.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할 일이었을 때는, 마치 남의 불행인 것처럼 대하던 종구가 적극적으로 변한다. 개를 죽이고, 무당을 부르고, 친구들과 산을 격렬하게 뒤진다. 

옷을 벗고 난 뒤 더 격렬하게 발버둥치는 종구다

현대 국가는 시민에게 공권력 사용 권한을 위임받는다. 격하게 말하면,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는 존재란 설명도 있다. 그렇다. 종구의 상징은 게으른 공권력이다. 


아니다. 공권력은 성실하다. 


공권력은 시민을 감시하고, 억압하고, 옥죄는 데에 성실하다. 차벽은 유가족보다 먼저 도착해있고, 경찰들은 시위대보다 항상 앞서있다. 촘촘하고, 섬세하게 시민을 옥죈다.


하지만, 공권력을 집행하는 자는 게으르다. 


안전에 대한 규칙 준수라든지, 불법 경영에 대한 감시라든지, 사법 정의에 대한 준수라든지 시민을 위한 무언가를 할 때 항상 책임자들은 게으르다. 


하지만, 시민들의 분노가 집행자로 향하면 집행자는 바빠진다. 그렇게 성실할 수가 없다. 홍만표는 압수수색이 떨어지기 전 이미 검찰과 입을 맞추고, 관피아들은 꼬리자르기를 시행한다. 세월호는 유병언만의 책임으로 몰아졌다. 국정원 댓글은 결국 개인의 일탈로 귀결됐다. 관피아는 '해경 해체'라는 단어로 끝나는 듯했지만, 기표가 없어진다 해서 기의가 사라지진 않는다.


우리는 믿지 않는다. 시민이 위험할 땐 딴청 부리다가, 딸이 위험해지니 본인의 사회적 지위를 근거로 딸에게 안심을 요하는 종구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종구가 최선을 다한 바는 맞다. 하지만 그가 옳거나, 그저 불쌍한 사람만은 아니다. 어찌 보면 외지인은 벌 받아야 할 사람한테 벌을 준 것이기도 하다. 


알고 있다. 종구는 필부다. 


생각해보면, 종구는 그리 착하지 않다. 어찌 보면 '필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구가 필부인 세상은 그만큼 위험하다. 시민들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집행자들이 사회를 상징하는 제복을 입을 때 게으르다면, 그 사회는 위험하다. 이익의 사유화와 비용의 사회화가 절로 이루어진다. 집행자가 게을러지면, 그의 이익은 늘어나지만 사회 전체적으론 비용이 늘어난다.


책임자들이 시민의 안전에 뒷짐지고, 본인의 안전이 개입되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건 지극히 동물적 본능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인이다. 사회에 사는 동물이 아니라, 사회인으로서 공동체에 사는 사람이고 책임자로서 행동해야 한다. 


종구는 말한다. 

아빠가 경찰이니까 아빠 믿지, 아빠 경찰이니까 거짓말하면 들통나.


딸은 말한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



무엇이 중요할까. 무엇이 중요한지 묻고, 책임져야 할 때 종구는 가만히 있었다. 어찌 보면, 종구는 가만히 있는 죄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게 아닐까 싶다. 사회적 문제로 인해 남이 고통받을 때 가만히 있으면 그 다음의 타깃은 나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060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