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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n 08. 2016

0.2점짜리 20살 인생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2&oid=056&aid=0010325226

경상자는 0.05점, 중상자는 0.1점, 사망자가 발생했을 경우 재계약 시 0.2점을 감점하도록 돼 있습니다.
반면, 사고로 열차 운행이 10분 이상 지연될 경우 1점을 깎도록 돼 있습니다.

5월 28일 구의역에서 잠실나루역 방향으로 지나가던 승강장에서 사고가 있었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20살의 수리공이 죽었다. 이 사고로 인해 지하철 운행이 약 30분 지연됐다.


사고로 열차 운행이 10분 이상 지연되면, 재계약시 수리용역업체는 1점이 깎인다. 사고에서 1명이 가볍게  다치면 0.05점이 깎인다. 중상을 입으면 0.1점이 깎인다. 한 명이 죽으면, 0.2점이 깎인다. 결과적으로 구의역 사고와 관련 수리로 인해 30분이 지연됐으니 은성 PSD는 재계약시 3점이 깎인다.


3년 전 신도림역에서 정비작업을 하던 직원 두 명이 다쳤다. 한 명은 0.1점만큼 다쳤다. 그는 다리를 절단했다.


2016년 5월 28일에 있던 사고로 인해 은성 PSD는 재계약시 0.2점이  깎인다. 20살 정비공 김군이 죽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비공이 죽으면 재계약시 0.2점이 깎인다. 수리 때문에 지하철 운행이 10분 지연되면 1점이 깎인다. 다리 하나는 0.1점, 목숨은 0.2점. 정비공 5명이 죽어야, 지하철 운행 10분 지연과 맞먹는다. 1명당 2분이다. 


그가 죽는 데에는 몇 분이나 걸렸을까. 그가 쌓아온 20년은, 끽해야 2분어치의 죽음이다. 2분이면, 지하철이 구의역에서 출발해 잠실나루역에 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한 정거장 어치의 죽음이다.

20년동안 엄마의 아들, 애인의 사랑, 친구의 좋은 친구로 성장한 그 친구는 이제 '19살 김군', '구의역 사고의 희생자' 따위의 수식어를 받는다. 너무 일찍 꿈을 뱉은 죄일까. 너무 일찍 사회에 발을 내딛은 죄일까. 꽃을 피웠는지, 피운 게 꽃인지 열매인지 구분도 못할 때에 그는 그렇게 사그라들었다.


그는 서울 메트로의 수리용역업체의 직원이었다. '2인 1조'로 다녀야했지만, 사람이 없어서 혼자 다녔다. 메트로 정규직은 알았겠지, 그가 혼자 주말마다 10개 넘는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를 수리해야 했다는 사실을. 그의 동료도 알았겠지. 아마, 그의 격무를 몰랐던 사람들은 지금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러니하다. 그를 영원히 기억하려는 사람들은, 이 사건 전까지 그의 일은커녕 그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 그 친구가, 그 친구로 이 사회에 존재할 수 있게 된 계기는 그의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만이 그의 이름을 불러줬다.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현장실습생'으로 뛰다가 결국 회사 직원의 이름을 단 친구였다. 비정규직이었지만, 어엿한 직원이었다. 첫째 아들로, 책임감있게 살라는 엄마의 말을 지키던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껏해야 0.2점어치의 감점이다. 


그가 살아온 20년은 노래 몇 곡이나 들어갈까. 한 명의 죽음은 지하철 운행 2분동안의 지연이니 헬스장에서 우리집까지 올 때 대체 청년 몇 명이나 죽은 걸까. 


가끔 세상 사는 게 무섭다. '효율화'를 명목으로 인건비를 감축하면, 사측은 환호한다. 목표치만큼 경영을 효율화했으니 간부에게 포상을 준다. 인건비 감축을 통한 효율화 달성은 해고요, 빈곤이다. 누군가의 포상은 누군가의 눈물이요, 죽음이다. 얼마나 비용을 달성했는지는 그만큼 그 사람들의 삶이 잘렸다는 의미인데, 통계는 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효율화를 명목으로 잘린 해고자들은 후에 TV뉴스에서 '노인빈곤'이라든지, '고개숙인 자영업자' 따위로 나온다. 


나는, 어떤 뉴스가 될까. 효율화를 달성해 보너스 파티를 하는 간부가 될까 아니면 '철밥통'이라는 기묘한 수식어를 받다가 효율화의 희생양이 되어 고개숙인 자영업자가 될까. 이도저도 아니면, 또다른 사고의 희생양이 될까.


김군은 사고의 희생양이 아니다. 구조의 희생양이다. 빨리빨리문화와 낮은 인건비의 문화, 안전을 뒷전으로 두는 문화가 김군을 죽였다. 은성 PSD가 죽인 것도, 서울 메트로가 죽이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칼을 쥐었을 뿐이다. 그 칼을 누가 만들고, 누가 그들로 하여금 그 칼을 들게 만들었을까. 


안전을 이야기하면 곧 비용으로 치환하고, 비용은 곧 비효율로 치환하는 정치권과 언론, 기득권이 범인이다. 이 구조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내 브런치의 글이, 내 페북의 글이 그를 추모하는 데에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바꾸고 싶다. 말하고 싶다. 힘을 얻고 싶다. 


나부터 바뀌겠다. 나부터 말하겠다. 나부터 노력하겠다. 사소한 데에서부터 중요한 곳까지. 정비와 수리에, 정당한 지연에 화내지 않고 기다리겠다.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착취하는 구조를 개선하는 데에 드는 돈을 '불필요한 비용'으로 생각하지 않겠다. 정당한 임금이다. 구조의 상층부만을 바라보지 않겠다. 기표만이 전부가 아니다. 구조의 상층부가 기표라면, 구조를 만든 이들은 기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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