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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n 08. 2016

<0608>

님을 위하 행진곡 / 표현의 자유는 위기다 / 여성혐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6160

언젠가 네게 1980년대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고 싶다. 비록 그 숱한 오류와 돌아보기조차 싫은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대학생들이, 청년들이 살인적인 독재정권에 의롭고도 줄기차게 저항한 역사는 한국사, 아니 세계사를 통틀어 어디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빛을 발한다. 백기완처럼 ‘산 자’와 윤상원같이 ‘죽은 자’의 육성이 넝쿨처럼 엉키고 담쟁이같이 역사의 담장을 타고 오른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은 언제나 그 빛의 한가운데에 있었어. 독재에 맞서 싸우다 제 몸에 불을 댕겼던 사람들도, 절망으로 그득한 밑바닥에서 술 취해 나뒹굴던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부르며 삶을 다지고 죽음 앞으로 나섰다.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의 깃발이자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공화국 헌법에 대한 찬가였다.
그런데 이 노래를 ‘국론 분열’의 우려가 있다고 나대는 사람들이 있구나. 아빠는 그 사람들의 나라(國)가 어디인지 묻고 싶어. <님을 위한 행진곡>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살 권리가 없다. 백기완을 고문하고 윤상원을 죽인 독재가 그립다면, 그들은 차라리 휴전선 넘어 북한으로 올라가는 게 맞을 거야. 그들이 원하는 나라는 그런 나라니까. 지은이가 멀쩡히 이 땅에 살아 있고 이 노래에 붙여진 사연들이 있는데도, <님을 위한 행진곡>에서 ‘님’이 김일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냐고 떠드는 ‘종북주의적’ 상상력의 소유자들도 활개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북한으로 가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여기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란 말이다.
이 노래가 불편한 자들은 민주주의가 불편한 거야. 사람을 반으로 꺾어버리는 고문이 넘쳐나고 중무장한 군대가 시민의 살을 헤집고 군화로 짓밟고 총으로 쏜 것을 당연시하는 파시스트들이다. 아직까지도 ‘광주 항쟁’이 아니라 ‘광주 폭동’이라 부르고 싶어 혓바닥이 들썩이는 자들이야. 그들의 코앞에서 아빠는 이 노래를 가사 하나 하나 씹으면서 불러주고 싶구나.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피눈물로 부르는 노래엔, 시대의 피와 눈물이 담겨있다. 시대를 잊으려는 자는 피하지만, 시대는 피하려 한다고 피해지지 않는다. 시대는 엄중하게 다가온다. 시대에 당당하게 살아가자.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60607204735914


트레킹은 항상 버티기의 신호. 문재인은 무엇을 버틸 것인가. 대선 후보로서 호명당하는 자신을 지키려는 몸부림인가 아니면 양산에서 유유히 일상을 즐기는 자신을 지키려는 몸부림인가. 2. 문재인이 돌아온다면 그에게 경제 비전을 제시할 참모와 함께 오면 좋겠다. 3. 더이상 사람들은 사람만으로 대통령을 뽑지 않는다. 구체적인 비전이 필요하다.


http://kisdi.re.kr/kisdi/fp/kr/board/selectSingleBoard.do?cmd=selectSingleBoard&boardId=GPK_WRITES&curPage=1&seq=31447&reStep=30199&ctx=_

이 글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바람이 있다면, 실패에 대한 인식 또한 관대해져서 누구에게나 한 번의 재도전 기회는 자연스러운 인식이 형성되었으면 좋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또는 창업에 도전하는 모든 청년들에게 취업과 창업은 첫 도전이다. 처음 도전하는 경우, 누구나 시행착오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이 이 글의 제목처럼 ‘실패해도 괜찮을 수 있는 나라’, 나아가 누구나 한번 정도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도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실패에 대한 포용과 재도전에 대한 장려가 필요하다 

재수생은 영원한 패배자가 아니지만, 그렇게 인식되지 않지. 

몇번의 실패에 대한 허용은 결국 문화의 문제다. 한국은 그간 0 or 1, 이진법에 갇혀 살았다. 하지만 가치가 다양하듯이, 세상은 다양한 수로 읽어야 한다. 

누구나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라가 진짜 나라다. 지금의 한국은 정글일뿐이다.


http://www.adweek.com/news/advertising-branding/4-reasons-why-food-exploding-perfect-marketing-medium-171832

음식이야말로 최고의 마케팅 도구라는 이야기. 


음식은 소셜미디어에 최적화됐고, 

쉐프는 엔터테이너인 동시에 에듀케이터이자 마케터, 

음식은 우리 생활과 시대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에. 

음악은 우리가 만들지 못한다. 그저 들을뿐. 하지만 음식은 우리가 제조도 가능. 이게 큰 차이. 

콘텐츠의 궁극은, 결국 유저가 경험하고 그 경험을 다시 공유하는 일. 음식은 이 지점에서 최고다. 

한국은 아직 음식을 그저 먹거나, 먹는 걸 보는 등의 소비재로 쓰고 동시에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마케팅 도구로 쓴다. 

페스티벌을 대표하는 음식이 잇으면 좋겠다. 푸드페스티벌이 아니라 락페의 아이콘이 될 수 있는 음식이라든지. 

미디어 매체라면, 미디어 매체의 주 타깃이 어떤 음식을 먹냐, 언제 어떤 걸 먹냐를 타겟으로 해 SNS를 운영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


http://www.economist.com/news/leaders/21699909-curbs-free-speech-are-growing-tighter-it-time-speak-out-under-attack

Third, the idea has spread that people and groups have a right not to be offended. This may sound innocuous. Politeness is a virtue, after all. But if I have a right not to be offended, that means someone must police what you say about me, or about the things I hold dear, such as my ethnic group, religion, or even political beliefs. Since offence is subjective, the power to police it is both vast and arbitrary.
Concern for the victims of discrimination is laudable. And student protest is often, in itself, an act of free speech. But university is a place where students are supposed to learn how to think. That mission is impossible if uncomfortable ideas are off-limits. And protest can easily stray into preciousness: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for example, suggests that it is a racist “micro-aggression” to say that “America is a land of opportunity”, because it could be taken to imply that those who do not succeed have only themselves to blame.
Opinion polls reveal that in many countries support for free speech is lukewarm and conditional. If words are upsetting, people would rather the government or some other authority made the speaker shut up. A group of Islamic countries are lobbying to make insulting religion a crime under international law. They have every reason to expect that they will succeed.
In all areas of life, free debate sorts good ideas from bad ones. Science cannot develop unless old certainties are queried. Taboos are the enemy of understanding. When China’s government orders economists to offer optimistic forecasts, it guarantees that its own policymaking will be ill-informed. When American social-science faculties hire only left-wing professors, their research deserves to be taken less seriously.

특정 사안에 대한 이야기나, 표현을 금지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에 기여한다. 같은 논리 구조니까. 어떤 것이든 모욕당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논쟁의 도마에 올라올 수 있다. 우리는 특정 소재가 도마에 올라온 다는 거에 분노 할 필요가 없다. 도마에서 어떻게 토론되냐, 무슨 근거로 토론하는지를 지켜보면 된다. 성역은 없다. 성역 있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https://theconversation.com/why-do-you-make-stupid-decisions-when-the-experts-tell-you-otherwise-60020

And it is true that paying attention to the evidence of experts can be uncomfortable. There are difficult contradictions that require humiliating climbdowns. Humans tend to avoid what psychologists call cognitive dissonances at all costs. When the facts don’t fit our beliefs we tend to prefer to change the facts, not our beliefs. In our own research we found that senior managers would ignore evidence that expensive change process had failed so they could cling to the idea they had wisely allocated the company’s precious resources. A study of the decline of mobile phone company Nokia shows this process very clearly.

사실이 나의 완결되지 않은 믿음과 다르다면 의심하자. 

의심하고도 사실이 그대로라면, 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믿음과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자세가 가장 현명하다.


http://www.huffingtonpost.kr/2016/06/07/story_n_10330084.html

그런데 사회적 자원, 권력이 없는 여성들끼리의 유대로 남성과 같은 유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젠더간 비대칭성, 압도적인 권력 차이를 생각해 보면 '남성혐오'는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패러디를 하면 본인의 레벨을 상대의 레벨로 낮추게 되는 결과도 낳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젠더간의 압도적인 권력 차이를 생각해 볼 때 '미러링'은 적절한 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 남성들이 남발하는 반동적인 전략에 똑같이 휩쓸릴 수 있다."
"여성혐오는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굉장히 내면화된 것이기 때문에 극복하기 굉장히 어렵다. 여성혐오는 어떤 상대에게 성적 욕망을 갖느냐에 대해서까지 작용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자신보다 힘 있는 남성(예: 몸집이 크다/재력이 있다/똑똑하다 등)을 파트너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한 '여성혐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남성들이 자신보다 힘없고 지배하기 쉬운 여성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도 '여성혐오'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연애'에 있어서 여성혐오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안이 있다면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는지'를 기준으로 관계를 돌이켜보는 것이다.
남성의 지배와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연애 상대를 고를 때는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을 고르라는 것이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NO'라고 말해야 한다."

스스로를 증명하는 데에 있어,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게 증명의 근거가 되는 사회는 얼마나 참담한가. 현재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을 무시하지 않고선 존재할 수 없는 걸까. 

메갈이 남혐이냐. 걍 인터넷코드로 낄낄대는 거 뿐이지. 그게 남혐이냐고. 몇번 말하지만, 남혐이 존재하려면 남자를 향한 유리천장이 있어야. 

말했잖아여. 지역드립도 미러링하면 수준 낮아지는거라니까 ㅠㅠ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람과는, 깊은 사적 관계를 만들지 말자. 서로에게 그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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