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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l 01. 2016

노래다시듣기 - 슬픔이여, 이제 안녕

감정을 마주하는 방법

사람의 성향을 알아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과 대화할 때 눈을 바라보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사소한 습관에서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졌는지,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 등의 거대한 가치관 등을 통해 성향을 알 수 있다.


문제가 생길 때, 회피하는 사람이 있고 마주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쉬운 방법이나 근본을 해결하진 않는다. 뜨거운 열기를 피하는 우리처럼,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면 바로 빼는 우리처럼 동물적이고 자연스럽다. 피한다고 해결되는 세상이면 좋겠으나, 그렇진 않다. 후자는 어렵다. 문제를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죽을 때까지 겪는 많은 문제 중 절반가량은 나 때문에 일어났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아를 비판하고 고쳐야 하는데, 예수인들 쉽겠는가. 나머지 절반은 남 때문에 일어난다. 친구든, 부모님이든 얼마나 가까워봤자, 타인이다(기계적 의미다). 내가 그 사람을 강제할 순 없다. 이 떄문에 해결은 어렵다. 


글을 읽을 때마다, 영상을 볼 때마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마다 내가 아는 사실은 한 가지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많다


이 문장만이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언론, 사회, 노동, 돈, 여자, 사랑, 가족, 노후 등에 대해 뭐가 말할 수 있겠는가. 안다고 말하는 건 용기가 필요하나, 용기가 사실이나 진실을 담보하진 않는다. 항상 틀릴 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


아,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감정'.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느껴서 무슨 말을 하고 싶고,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지는 오롯이 나의 결정이다. 나만의 것이다.


이 점에서 감정은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 할 친구다. 부모는 내가 누군가의 부모가 되면 이별할 준비를 한다. 영원을 약속하는 여자친구는, 영원히 못 볼 사이가 된다. 평생 함께 할 것만 같던 친구들은, 어디선가 평생 삶에 고통받는다. 죽을 때까지 나를 떠나지 않는 유일한 놈은, '감정'이다.



여기, 감정을 노래하는 뮤즈가 있다.


자우림의 '슬픔이여 이제 안녕'

https://www.youtube.com/watch?v=9sXWnGNwK5w


가사는 이러하다. 

슬픔이여 이젠 안녕
다신 나를 찾지 말아 줘
어떤 추운 밤에도
어떤 궂은 날에도
저녁 어스름이 진 내 작은 창가에
어느새 별들이 내린다
너를 떠나 살 수 있을까
나의 가장 오랜 벗이여
나는 네가 없이는
내가 아닐 것 같아
차가운 너의 품 안에서 눈 감으면
어느새 꿈속을 걷는다
저기 먼 숲에서 짙은 어둠이
끝없이 속삭이는 너의 이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아
다시 너에게로 간다면
슬픔이여 그러니 안녕
이젠 나를 그만 놓아 줘
어떤 추운 밤에도 어떤 궂은 날에도
너에게 건네려는 마지막 인사에
어느새 눈물이 내린다


양가적 감정이 느껴진다. '나를 찾지 말아 줘'라고 말하지만, '나는 네가 없이는 내가 아닐 것 같아'라고 슬픔을, 아니 슬픔이 만든 '나'를 긍정한다. 다시 슬픔을 마주한다면, 세상이 무너질 듯 아프고, 내가 내가 아니게 될만큼 걱정되지만 그래도 너에게로 또다시 가는 '나'다. '나'는 헤어지지 못할 거 알면서, 헤어짐을 고한다.


자우림은 -아니 김윤아는- 슬픔과 우울함을 노래한다. '낙화'가 그러했고, '미안해 널 미워해'가 그러했다. '야상곡' 역시 그러하다. 대부분의 앨범이 우울함과 슬픔에 기인한다. 우울함으로 인간의 실존을 고민하고, 자살까지 논하는 '이소라'보다는 덜 파괴적이고, 몽환적 소리로 대중을 치유하려는 '넬'보다는 고요하고 무겁다. 


하지만 이 노래는 좀 다르다. "나는 이렇게 슬퍼서, 이렇게 우울해"가 아니라, "슬픔, 너는 내 평생의 친구야. 안녕, 잘가렴. 아, 근데 넌 날 떠날 수 없구나. 내 평생의 친구여"라고 노래한다. 헤어질 수 없는 걸 알면서, 헤어지자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헤어지면 슬픔이 아니고 감정이 아니다. 이 노래는 노래지만, 김윤아라는 인간의 고백이 아닐까 싶다



슬픔이란 감정은 사람과 평생 함께 한다. 요즘 세상은, 기쁨이 기본값이 아니라 슬픔이 기본값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든다. 슬픔을 마주하는 친구들에게 가끔 이렇게 말한다


마음껏 슬퍼해봐, 어떻게든 되겠지

물론, 책임지지 못하는 이야기다. 슬픔은 쾌보단 불쾌고, 


슬픔이란 감정은 음이요, 침전이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태양과 장마가 함께 하는 기괴한 여름날의 침대처럼 사람을 침전시킨다. 하지만 침전엔 끝이 있기 마련이요 그 끝엔 상승이 이어진다. 결국, 슬픔이란 웬만하면 끝이 있고, 그 끝엔 다시 비-슬픔(행복인진 모르겠고)이 있기 마련이다. 끝이 있는 친구다.


끝이 있는 친구지만 또 작별은 없다. 삶은 희노애락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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