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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l 01. 2016

일련의 보도통제에 대한 단상

우끼기끼끼

어제 충격적인 기사가 하나 있었다. ['KBS 보도 통제' 파문]길환영 "윤창중 성추문 줄이고, 국정원 댓글은 방송 말라" 


요지는, 이러하다. 2014년 5월,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당시 KBS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한 것. 김 국장은 당시의 통화내용을 녹음했고, 통화내용은 며칠 전 경향신문을 통해 공개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uXkUfqQONHU


대화내용은 코미디다. 이 시기에 - 세월호 시기다 - 해경을 때리는 게 말이 되냐, 하필 오늘 대통령이 봤으니 내일 아침 보도는 막아달라, 한 번만 살려달라 등등. 청와대 홍보수석이라는 사람이 보도국장에게 '보도를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왜냐고? '대통령'이 봐서 노했으니까. 


이 내용이 퍼진 계기도 코미디다. '내부고발'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김시곤 보도국장은 '쓰레기'다. 김 국장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달도 안 지났는데 교통사고 사망자와 세월호 사망자의 숫자를 비교했다.(참고 : KBS본부, 김 국장 회식자리에서 “세월호, 교통사고보단 희생자 많지 않다 주장”…김국장 “세월호 희생자 만큼 교통사고 희생자가 많다는 발언)


뿐만 아니다. 4대강에 관한 보도를 막고, 용산 '참사'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는 등 언론의 품격은커녕 인간의 품격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사람이 뭘 계기로 언론 단체를 통해 녹취내용을 공개했을까?


KBS가 자기를 파면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교통사고' 발언으로 인해 여론의 질타를 받자, 이때다 싶어인지 KBS경영진과 청와대 이사진이 김씨의 사임을 종용한다. 수많은 불의엔 참아도, '사임'이라는 두 글자의 불이익은 못 참았다. 김씨는 자신이 망가지는 데에 일조한, 그 언론을 통해 '길환영 사장이 보도에 개입했다'를 폭로한다. 그 후 재판까지 이어졌고, 녹취록은 재판 도중 공개됐다. 



언론은 왜 존재할까. 


미디어학부(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으나,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이다. 묻지 않은 질문이니, 답한 적이 없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원론적 답변밖에 할 수 없다. '감시와 견제'라는.


언론이 견제하는 건 저-기 멀리 있는 푸른 기왓집의 사람만이 아니다. 병원에서 생사 여부가 엠바고가 걸릴 만한 거물만을 견제하는 것도 아니다. 언론이 뭐라고 보도하든 청와대의 그분은 '지껄이는구나'라고 지껄이며, 기업의 거물의 대관 담당자는 '돈이나 줘라'고 지껄일 거다. 견제는, 먹혀야 견제다.


당장, 견제가 먹히는 건 현장의 권력이다. 용역 깡패도 기자 앞에선 쇠파이프를 휘두르기 부담된다. 의경도 카메라 앞에선 최루액을 마구 뿌릴 수 없다. 아주 자그마한 위축효과지만, 그 위축효과가 행정부의 권력이 집행에 영향을 준다면 아주 거대하다. 거대한 행정부를 상대하려면, 거대한 놈만이 필요하다.


기자가 현장에 없으면, 웃는 건 권력집행자다.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을 체포하기 쉬워지며, 때리기 쉬워진다. 전쟁터에선 살인하기 쉬워지며, 사고 현장에선 피해자가 무시받기 쉬워진다. 기자의 역할은 현장이라는 아주 자그마하고 거대한 곳에서 빛나기 마련이다.



청와대라는 거대 권력이 저거는 보도하고, 이거는 보도하지 말라고 말하는 작태는, 작태다.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그 의도는 불순하고, 정치적이다. 자기네가 원하는 현장만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원치 않는 현장은 시민들에게 소외시키고 사회에서 제거한다. 


대개 그들이 원하는 현장이 대통령이 행사장에 나타나 새마을운동을 언급하거나, 창조경제라는 허울뿐인 단어를 지껄이는 곳이다. 대통령과 대통령의 수행원 그리고 그들에게 선택받은 몇몇의 시민들은 웃고 있다. 프라임 타임에 TV를 통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보는 우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그들이 원치 않는 현장은 행정부의 나태와 태만이 드러나는 곳이다. 복지 예산이 100조지만 여전히 저소득층이 죽어나는 현장, 해경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300명가량이 수장된 현장, 청와대의 치적이라 불려야 하는 순방이 '성추문'이라는 민낯을 보이는 장소 말이다. 이런 기사가 나올 때마다 권력을 가진 의사결정권자는 울상이다. 왕이 저 기사를 보면 얼마나 분노할지, 얼마나 욕먹을지를 고민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저 기사를 보는 우리의 표정은 일견 밝아보인다. 하지만 그 밝음은 '역시나 니네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식의 썩은 미소다. 저 현장을 보도 하지 않는 공영방송에 보내는 조소이기도 하다. 



권력은 왜 존재하는가. 사회를 향해, 사회를 위해,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개개인으로서의 우리는 미약하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서로'를 믿는다. '서로'는 국방과 치안을 위임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 무언가는 정부요, 그 정부의 수반은 대통령이다. 위에 언급한 의사결정권자는 매우 강해보이지만, 끽해야 우리가 위임한 무언가밖에 안된다. 행사장에서 90도로 인사해야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대통령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며, 권력은 절대적으로 이기적이다. 가만히 내비두면, 이기적이기 마련이다. 권력이라는 추상적인 한자어도, 까고 보면 이기적 개인들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이기적일 때의 부작용은 미약하다. 끽해야 편의점에서 가게를 훔치고, 친구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하지만 권력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면, 위험하다. 그 폐해의 규모는 가늠하기 어려우며, 고치기도 어렵다. 그래서 언론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권력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하며 권력의 이기를 억제하기 위해. 일종의 '사전규제'다.


행정부라는 거대 권력을 배라고 치면, 언론은 그 배의 키가 우리 사회를 향하는지 지켜본다. 



정부는 왜 존재하는가

시민을 위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언론은 왜 존재하는가

그 공공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보도를 통제하려 한 청와대의 모양새는 초라하다. 매년 시즌마다 돌아오는 감사를 피하는 피규제기관인 셈이다. 아니다, 감사기관을 규제하는 어떤 분야를 감사받을지 정하고, 어떤 분야를 피할지 정하는 오만한 기관이다. 어느 곳보다 공공을 위해야 하는 기관이, 공공을 위해선 어떤 회초리도 기꺼이 맞아야 하는 기관이, 스스로 공적기관임을 포기했다. 임기가 끽해야 2년도 남지 않은 정권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정했다. 권한을 위임받은 주제에 시민들 위에 군림하려 했다. 자기네들의 실수는 가리고, 공적만을 치장하려는 행정부는 정당하지 않다. 촌스럽고, 구태의연하고, 역겹다. 그렇게 시장을 살리자는 행정부가, 자기네에 비하면 끽해야 사고 파는 권한밖에 없는 기업도 지키는 규칙을 깼다. 


사전규제를 받아야 하는 시장에, 사전규제를 부정하는 사업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사전규제를 피한다는 문장 하나는, 기업 자체를 시장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다. 스스로가 존재하기 위해 받는 최소한의 견제마저 부정하는 행정부는 사회를 향하기는커녕 푸른 기왓집에 있는 누군가의 이기심만을 향한다.


정부와 언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학부 졸업생도 아는 간단한 이치를 외면하는 그런 역겨운 이들이 지금의 의사결정권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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