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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Aug 16. 2016

<다시보기>곡성

올림픽과 기성세대 그리고 박수

새벽은 적막하다. 내일 아침 8시부터 일이 있는데, 집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서 잠을 자면 무조건 지각할 느낌이다. 밤을 새기로 했다. '그래서' 따위를 쓰지 않고도 문장의 의미를 전하려 하는데, 쉽지 않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권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대화는 어렵다. 


소통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실 자기 말을 들어주면 소통이고, 아니면 불통으로 취급하니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는 사회에 나오는 말이란 다 쓸데없는 말이다. 말이 너무 많아 진짜 말이 뭔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알겠지만 내가 말한 '사회'는 지극히 SNS와 인터넷 국한이다. 모니터와 핸드폰 바깥 사회에서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진짜 말과 가짜 말을 구분하는 게 의미없지만 어느덧 진짜 말은 이진법의 세계에 갇힌 듯하다. 


사람과 말하는 게 '희귀한'일이 되버린 지금, 서로 간에 '잘했어', '그건 부족했지만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아', '고생했어'라는 말이 희소해진 지금 모두에게 필요한 건 어느 정도 단촐한 응원이다. 과한 응원은 거짓일 확률이 높고, 그렇다고 응원하지 않자니 세상이 너무 삭막하다. 사실 우리는 지금을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서로를 응원해야 한다. 내 가치관은 꽤나 회의주의적이고 염세주의적일 때가 있어서 사람이 음식을 입에 넣고 위장으로 소화하고 대장으로 내보내며 하루를 산다는 것 자체가 꽤나 기적적이라고 생각한다. 광복절이 어쩌고저쩌고, 건국절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 모두 입에서 대장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부산물일 뿐이다. 주는 살아감이요, 부는 떠듬이다. 이 관점에서 모든 말은 쓸모 없는 말이 되어버린다. 이런 새끼가 전화를 하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한숨을 쉬는 걸 보면 나새끼, 엥간히 쓸모 없는 놈이다. 


<곡성>의 마지막 장면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종구가 귀신 쓰인 딸 효진에게 손짓을 하며 이름을 부르는 장면을 좋아한다. 2시간 36분 동안 치루어진 종구의 서사의 마무리이자 동시에 시작이기 때문이다. 


왜 마무리이자 시작이냐고? 


종구는 2시간 36분 동안 딸 효진이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병원에 가서 진단 받기도 하고, 그게 안되자 황정민에게 굿을 부탁한다. 산에서 구르고, 넘어지고 일본인을 차로 치면서까지 곽도원은 딸을 구하려 한다. 믿지 않던 무속신앙을 믿고, 현대인에게 금기시된 살인까지 저지르며 딸을 구하려 한다.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어도 그랬을 거고, 아내였어도 그랬을 거다. 사람은 게으르지만,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사람'은 성실하고 애잔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해 종구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다. 곡성 시골 마을 순경의 월급으로 한 번에 몇 백만원이나 되는 굿을 하고, 일상을 바꾸어 백방으로 쏘다니지만 남는 건 귀신 쓰인 딸이다. 


영화 마지막에 종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자신의 모든 것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다. 


"효진아, 효진아, 효진아"


세 마디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하지만 관점마다 다르다.


귀신 들린 딸에게 "효진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제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죽인 효진이를 감싸며 "괜찮아, 효진아 이리 와"라는 걸 수도 있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딸에게 "효진아, 괜찮아 내 새끼" 라고 사랑을 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쟀거나 저쨌거나 종구는 실패했다. 이루고자 했으나, 지키고자 했으나 실패했으니 패배자다. 하지만 관객은 안다. 전술했듯이 종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면서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효진이를 지키고자 했다. 관객은 종구가 효진이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는지, 그 애틋함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하지만 노력이 어떻게 됐는지 모두 아는 유일한 목격자다. 모든 과정을 목격한 종구를 '패배자'보다는 '열심히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어쩌면 '세상 모든 패배자들에게 보내는 찬사'일 수도 있다. 우리가 쉽게 많은 사람을 '패배자'라 부른다. 공부 못하는 사람, 과체중인 사람, 코가 비뚤어진 사람, 성형수술한 사람, 월급이 적은 사람 등등. 1등을 제외한 많은 사람을 패배자로 치부하니, 우리가 만나는 대다수의 사람은 '패배자'다. 


웃긴다. 각 분야에서 상위 몇 퍼센트까지만 승자로 인정한다. 근데 그 분야도 몇 개가 안된다. 돈, 외모 등 사회적 지위. 


그 사람들이 한 노력이나 노력했지만 극복할 수 없던 벽 따위 '패배자 판독기'인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우린 그래서 그 사람의 지위가 부장인지 팀장인지 월급이 천단위인지 억단위인지로 쉽게 사람을 판독한다. 마케팅이 실패했냐 안했냐도 아니고 그 사람의 인생이 성공했는지 안했는지를 빙산의 일각으로 판단하는 게 좀 웃기다.


며칠 전부터 하계 올림픽이다. 올림픽이 축제라는 말은 사치다. 리우 올림픽은 리우의 축제, 평창 올림픽은 평창의 축제다. 리우 바깥에 사는 우리에게 올림픽은 축제보다는 '운동 종목으로 이루어지는 간접 콜로세움'에 가깝다. 메달을 따지 못하면 '패배자', 'ㅈ밥'으로 부른다. 말초적 재미를 위한 거라면 고개가 30도 정도로 끄덕여지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분명히 선수의 인생 자체를 '패배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고개가 굳는다.


메달 시발! 이라고 외치는 거 같다


그 선수가 메달을 따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 선수의 아쉬움으로만 남겨두자. 우리는 아쉽다고 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종구의 노력을 보았지만, 선수들의 노력은 보지 못했다. 그 선수들이 언제 일어나 어떻게 운동을 하고, 원하는 것을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우리는 알 턱이 없다. 


메달을 따지 못해서 아쉽겠다, 메달 못 따서 아쉽다 따위의 이야기보단 노력을 많이 했겠구나 정도로만 남겨두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타인의 삶을 규정하고, 판단하고, 심판한다. 승자에겐 축하의 박수를, 아쉽게도 승자가 되지 못한 수많은 패자들에겐 '그래도 노력했으면 됐어. 내가 봤어(정형돈)' 정도의 말만 하면 되지 않을까.


기성세대는 여러 단어로 불린다. 꼰대, 개저씨 혹은 지금 우리가 이루는 것을 만들어준 위대한 선배세대(...). 판단이 극과 극이지만, 난 그저 그들에게 '고생하셨습니다'정도로만 말하고 싶다. 


어느 순간 어른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했다. '어른들은 알지 못해'보단 '어른이 되면서 많이 바뀌었겠구나' 정도로. 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을 거고, 비슷한 행동을 했을 거다. 셰익스피어의 서사가 21세기에 먹히는 것처럼, 그들의 고민과 그 것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거지 역시 비슷했겠지. 


어찌 됐건 난 그들이 살았던 시공간을 이어 받아 살고 있고, 아마 높은 확률로 그들의 삶을 Case Study해서 내 삶을 꾸려갈 거다. 좋든 싫든 '기성세대'라 불리는 집단은 내게 좋은 예시이며 동시의 나쁜 예시니까.


이 점에서 기성세대를 무조건 따를(Follow) 필요는 없지만, 이런 삶을 먼저 살았다는 점에서 감사의 박수 정도는 쳐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그 삶을 지금까지 유지했고 사회에 여러모로 기여를 한 사람들에겐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같은 사람으로서 존경심이 든다. 


이 점에서 곡성은 기성세대에 대한 애잔한 레퀴엠으로 봐도 괜찮다. 한때 한국 사회의 주역이었던 베이비부머세대가 이제 은퇴하는 것을 감안하면 자신이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베이비부머를 위한 장송곡 아닌가(...). 장송곡이 마냥 나쁜 것도 아닌 게, 죽음을 기리면서 부르는 노래니까 얼추 존경과 감사의 의미도 담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패배자로 불린다. 특히 기성세대는 현재 사회의 문제를 만들었다는 점, 그 문제 해결에 보수적이라는 점에서 까이고 기성세대로 묶이는 개개인 중 경제 능력이 없고 지위가 낮으면 더 패배자로 몰린다. 


어떤 어른인들 사회에서 패배자로 몰리거나, 퇴장하고 싶겠는가. 자신이 기여한 무대에서 빠지고 싶은 배우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필연적이라면, 다음 무대의 배우이자 연출가가 될 우리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수고했습니다' 정도 인사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세대 간의 단절이 문제라고 하는데, 딱히 문제 해결의 답은 안 보이고 서로 어느 정도 예의는 갖췄으면 해서. 


난 기성세대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진 않겠지만(그러고 싶어도 못한다), 그들이 나보다 먼저 삶을 살아왔고, 일궜다는 사실엔 무한한 박수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사실 이렇게 보니까 국제시장보다 백 배 천 배 나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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