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1. '수제'
- 어영부영 촬영을 끝내고 충무로역에서 회현역으로 향했다. 충무로역 4번 출구인가 번호가 기억나지 않는 출구엔 버거킹이 있다. 요즘 햄버거의 대세는 '수제'다. 이태원, 안암, 천호, 신촌에 있는 햄버거 판매점은 모두 수제버거집이라 자칭한다. 우리 역시 패스트푸드 판매점에 비해 최소 1000원에서 최대 1만 원 비싼 가격을 치른다. 그 놈의 수제라는 단어는 최소 몇 천원의 프리미엄을 갖고 있다.
- 사실 만드는 과정은 같다. 패스트푸드의 햄버거 역시 우리 나이 또래의 노동자가 만든다. 비록 직접 고기를 다지진 않지만 고기를 굽고, 빵을 굽고 감자를 튀긴다. 이미 체인점화된 수제버거 역시 고기를 공급받아 굽고 감자를 튀긴다. 이 점에서 수제버거와 패스트푸드 햄버거는 하등 차이가 없다.
- 그렇다고 해서 수제버거집의 수제라는 단어에 태클을 달고 싶진 않다.다만, 모든 햄버거가 수제인데 우리가 굳이 수제버거집에만 만드는 사람들의 정성을 느끼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 노동이 은폐됐다는 점이다.
- 우리가 구매하는 많은 재화와 서비스는 대개 수제다. 노동자의 숨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소프트웨어 역시 기본적으론 코딩으로 이루어져있고 노동자의 시간이 들어있다. 직접 손으로 한땀한땀 짜인 코딩은 아니지만, 그들의 노동이 담겨 있다.
- 수제라는 단어는 곧 그들의 노동이, 미화된 노동인 '정성'과 '손길'따위가 들어있다는 걸 의미한다. 수제버거, 수제떡볶이, 수제지갑 등 수제 제품이 많이 팔린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 노동이 은폐됐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우리 사회에 노동이 은폐되어있지 않았다면, 패스트푸드의 제품에도 노동이 있고 컴퓨터에도 노동이 있고 우리가 쓰는 콘돔과 모텔에도 노동자의 노동이 들어있다는 걸 안다면 우린 미화된 노동인 수제라는 단어에 굳이 프리미엄을 줄 필요가 없다. 다 알고 있는 뉴스는 뉴스가 아니듯이.
- 심상정은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를 외쳤다. 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쓸 필요 없다. 우리의 교육에, 모든 생활에 만드는 사람의 노동이 있다는 것을, 우리와 가장 자주 접하는 서비스업 노동자와 비정규직 파트타임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는 사회. 그런 사회가 필요하다.
- 영화 로건은 엔딩 크레딧 롤에 "이 영화는 몇 천 명의 스태프의 힘입어 제작되었습니다" 라는 문장을 넣었다.
- 나는 가끔 꿈꾼다. 이정재가 햄버거를 광고하지 않고, 햄버거를 만드는 알바생이 직접 햄버거를 광고하는 세상을. 많은 제조사의 광고가 자사의 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우면 좋겠다. CEO가 아닌 다수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주목받는 세상.
2. 경비원
- 아파트 경비원이 하는 많은 업무는 실상 대체된 지 오래다. (고급아파트 기준으로) 택배 자동화 시스템은 생겼고, 분리수거 역시 다음 자동화의 대상으로 보인다. 건설사는 IoT 시장의 주요 이해관계자 중 하나다. 위와 같은 배경을 고려하면 경비노동자 대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보인다.
- 이렇게 대체된 곳이 하나 있다. 바로 롯데리아와 맥도날드 등 패스트푸드점이다. 대부분의 매장은 이미 카드접수기를 사용하고 있다 (정식 명칭을 알지 못한다). 젊은 20대가 할 수 있는 주요한 노동시장은 패스트푸드는 자동화에 돌입했는데 사회적 반향이 덜하다. 그에 반해 60대 이상 고령층이 하는 경비 노동의 자동화는 사회적 저항에 시달리고 있다.
- 결국, 경비 노동의 자동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60대 이상 고령층 노동시장의 수준"이다. "이들이 경비 노동 대신 할 수 있는 다른 노동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칼같이 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 세상. 이런 사회가 자동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사회가 저들의 노후를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끊임없이 일해야 하는 현실에서 저들의 일자리를 자동화하려는 움직임은 대개 '적'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에 반해 20대는 패스트푸드 말고도 갈 곳이 많긴 하니까 저항이 덜한 거 같고.
- 결국, 자동화의 가장 큰 적은 사회적 저항이며, 사회적 저항을 낮추기 위해선 새로운 노동시장을 발굴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노동시장이 커지고 사회적 안전망이 강해져야만 자동화 및 혁신 기술의 도입이 가능하다. 그 점에서 테크 회사의 CEO가 기본소득을 주창하는 이유도 사회적 반발감을 낮추기 위해서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