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가는 택시에서 생긴 일
고향을 떠나 타지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집을 구하는 것이었다. 생소한 지역에 정착하는 것도 두려운데 앞으로 살게 될 집을 구하는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어려운 것 투성이었다. 열심히 손품과 발품을 팔며 괜찮은 집을 발견하고는 실제로 보기 위해 부동산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각자 퇴근을 하고 부동산 앞에서 저녁 여섯 시까지 만나자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부동산까지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서 출발했다.
하필이면 퇴근 시간이 맞물려 차가 너무 막혔다. 결국 원래 루트가 아닌 근처 지하철역이 있는 정류장에 내려서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때 마침 역 앞에 택시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기사님께서는 트렁크에서 무엇인가 작업을 하는 듯 보였다. 나는 빙 돌아가서 오래 걸리는 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한 번에 부동산에 가기 위해 작업을 하시는 택시 기사님께 다가갔다.
"기사님, 혹시 타도 되나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석으로 가시는 기사님을 보고, 다행이라는 생각에 재빨리 택시에 올라탔다.
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한 부동산이라 기사님께서 위치를 알기 쉽게끔 아파트 앞으로 가달라고 말씀을 드리고 택시를 타고 얼른 가겠다고 친구에게 연락을 남겼다. 기사님께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택시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채 50m도 가지 않아 택시 기사님께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 거기 위치가 어딘지 모르는데 직접 좀 알려 줄 수 있죠? "
당황스러웠다. 나도 이 지역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심지어 나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알만한 심각한 길치인데... 이런 나에게 길을 물어보시다니. 돌이키기에 택시는 이미 출발해서 도로 한가운데서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기사님께 그럼 주소를 불러 드릴 테니 차량 내비게이션에 입력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사님께서는 오늘 이 지역에서 이 택시를 타고 운행하는 즉, 모든 것이 처음인 날이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맙소사. 내가 어떻게든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길치이자 기계치인 내가 알려드릴 수 있는 방법은 도저히 없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려면 자동으로 작동하고 있는 콜 호출 프로그램을 꺼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소를 입력하려고 하면 콜 호출이 떠서 다시 처음부터 입력해야 했고 또 입력하다 보면 콜 호출이 떠서 다시 입력해야 했고 계속 이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내가 휴대폰 지도앱으로 내비게이션을 켜 놓고 기사님께 부동산 가는 길을 직접 알려드리기로 했다. 한동안 지도에서 알려주는 대로 길을 열심히 설명하며 10분쯤 이동했을 때쯤 내비게이션에서 안내하는 길 하나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도상에서는 굉장히 왼쪽으로 꺾여 들어가는 길의 모양을 보며 자신 있게 조금 뒤 좌회전 해서 옆길로 가주시면 돼요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 그 길은 그냥 정말 많이 굽은 길이었고 실제로는 좌회전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눈은 있지만 지도를 볼 줄 몰랐다. 그동안 지도앱에서 내가 의지 했던 건 실시간 위치가 뜨는 gps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은 그것보다 더 복잡했고, 길치이자 지도를 볼 줄 몰랐던 까막눈인 내가 내비게이션을 제대로 볼리가 없었다. 그리고 상황상 늦을지도 모른다는 조급한 마음이 안 그래도 잘 못 보는 지도를 더 못 보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정도로 심각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아 여기로 가면 다른 지역으로 빠지는 건데..."
결국 그렇게 내가 있던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가는 도로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나의 안내에 따라 당연히 믿고 오시던 기사님은 이제야 내가 네비를 잘 못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것 같았다. 하지만 서로가 잘 모르는 상황이었던 터라 차마 다른 말씀은 못하시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지점으로 갈 때까지 택시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기사님의 조급한 마음이 운전을 통해서 온몸으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나는 기사님께 죄송하다고 지도를 잘못 봤다고 말씀드리며 늦어도 괜찮다고 안전 운행해달라며 안심시켜 드렸다. 사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들어오게 된 거라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예기치 못하게 택시를 타고 도로 위에서 저녁 시간대에 드라이브를 하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 약속에 강박이 있을 만큼 늦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늦을지도 모르니 먼저 부동산에 들어가라고 친구에게 말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차에서 노을이 져가는 하늘을 바라보는데 그게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붉은 태양이 넘어가며 하늘이 다채로운 색상으로 물들어 가던 그 순간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할 만큼 기억에 남는 그런 저녁 하늘이었다.
결국 원래 출발한 지하철역 부근에서 부동산까지 30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 30분이 걸려 도착하게 되었다. 기사님께서는 서로 실수한 거니 호탕하게 택시비도 일부 깎아주셨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부동산에 사과를 드리고 이미 매물을 보고 나온 친구와 부동산을 나섰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가까운 거리에서 출발했지 않냐고 나무라며 친구가 물어봤다. 하지만 솔직하게 지도를 잘못 봐서 멀리 다른 시까지 다녀왔다고 말하기에는 놀림을 받을 것이 뻔했다. 대충 길을 잘못 들어서 늦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대신 저녁으로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말했다. 이날 있었던 상세한 내막은 나와 기사님만의 비밀이었다.
지금 돌이켜 봤을 때, 그날 약속 시간에 쫓기면서도 하늘이 그렇게나 예뻐 보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부동산에 가게 되면 예산 문제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알고 있어서였을까. 그날따라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계속해서 답답함을 느껴서였을까. 약속에 잘 늦지 않는 사람이 늦었다는 강박감에 스스로를 짓눌러서였을까.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날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이 하나 있었다. 예기치 못한 하루였다는 것.
예기치 못한 시간대에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노을을 만났다
그리고 이것이 그날 하루의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지도 위에서 나만의 나침반을 따라 길을 걸어가고 있다. 어떤 날은 원하는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기도, 어느 날은 유달리 길을 많이 헤매기도 한다. 모든 길을 한 번에 잘 찾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인생이라는 지도는 실제 지도보다 더 복잡하다. 그래서 나는 실제 길에서도 인생의 길에서도 자주 길을 잃고 헤매고는 한다. 그리고는 길을 잃을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불안함에 몸부림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길을 잃고 예기치 못한 곳에 가게 됐을 때,
그게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
평소에는 보지 않았을 하늘을 보게 되고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을 여유를 느끼며 그 순간 그 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지도를 잘 못 봐서 다른 길로 들어설 때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길이라는 건 다 연결되어 있다고. 그러니 조금 늦더라도 결국은 내가 가려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나는 이 말을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잘못 들어섰을지도 모르는 길을 또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