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이 선순환 되는 세상이 되길
수능을 끝내고 알바를 시작한 이후 정확히 세 번째 알바를 할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전의 알바들이 근무기간이 긴 편이 아니라 경력이 많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 정도면 어디서든 일을 아주 잘할 거라는 크나큰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새로운 알바를 구하기 위한 면접을 보러 다닐 때면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나를 안 뽑으면 누구를 뽑아?라는 당당함으로 무장했다.
그런 나의 자신감 있는 모습 덕분인지 첫 알바를 구하려고 가게 여러 곳을 돌아다녔을 때와는 달리 한 번에 쉽게 세 번째 알바를 구할 수 있었다. 이전에 근무했던 곳의 사장님도 좋은 분들이라 계속 다니고 싶었지만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알바가 필요했다. 그렇게 레스토랑 컨셉의 치킨을 판매하는 매장에서 홀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가게에 들어갔을 때 레스토랑 컨셉으로 꾸며진 가게를 보고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동안 동네에서 봐오던 치킨집과는 다른 세련된 느낌의 인테리어가 가득한 가게였다. 1.5층의 건물에 퓨전 치킨 메뉴를 팔고, 젊은 고객층을 타깃으로 하는 느낌의 치킨집이라고나 할까. 지금까지 일한 가게와는 다른 색다른 분위기에 잠깐 알바에 대한 기대감도 생겼다. 하지만 그 기대감이 좌절감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트레이를 그렇게 들면 안 되지. 다시 해봐."
레스토랑을 모방한 치킨집이라 그런지 정말 이상하리만큼 규칙이 많았다. 메뉴가 나오기 전 기본 세팅을 하는 방법부터 서빙 트레이를 드는 방법, 테이블에 접시와 집기를 놓는 순서와 위치까지. 매장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이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와 같았다. 주문을 받을 때도 고객님과 시선을 맞춰야 하고 주문을 받은 다음 다시 한번 메뉴를 확인하는 것까지. 수많은 규칙을 외우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치킨은 아무렇게나 줘도 맛있는 거 아니에요?라고 반항하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나는 월급을 받는 아르바이트생 단지 그뿐이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배우는 방법 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난 다음 돌이켜보니 수많은 규칙을 둔 것은 매장의 차별화 전략이었다. 레스토랑과 같은 체계적인 시스템과 고객 응대는 정확히 타깃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고 매장은 그 이후로도 꽤나 오랜 기간 승승장구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매일 혼나고 연습하는 인고의 시간을 보낸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 하나가 터지고 말았다. 그날은 유난히 손님이 없는 조용한 날이었다. 마치 학교 수업도 공강이었고 그날 오전에 근무하기로 했던 아르바이트생의 요청으로 근무시간을 변경한 나는 평일 점심시간에 가게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무료한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조용한 가게문을 열고 말끔한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자 손님 두 분이 가게에 들어왔다. 기본 세팅을 하며 얼핏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업차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상황인 것 같았다.
그 두 분은 가게에서 제일 인기 있는 치킨 한 마리와 맥주 1700cc를 시키며 대화를 지속적으로 이어 나갔다. 나는 치킨이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여 조금의 시간 간격을 둔 뒤, 생맥주 기계에서 맥주를 뽑아 손님에게 가지고 가기 위해 움직였다. 그 순간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분명 내가 서있는 바닥은 인테리어를 다시 한지 얼마 안 된 깨끗한 타일 바닥이었고, 그 어떤 장애물도 내 앞에는 있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주를 들고 가던 나는 무엇인가에 걸린 듯 발을 휘청 거렸고, 그대로 내 정면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의 옷에 그대로 맥주 1700cc를 쏟아버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내가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드리고 얼른 바로 달려가서 닦을 수 있는 수건 여러 개를 챙겨 왔다. 그리고는 정말 미친 듯이 손님의 옷을 문질러 닦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1700cc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이미 손님이 입고 있던 셔츠를 넘어 재킷, 바지, 양말, 신발까지 홀딱 젖게 만들었다. 입으로는 연신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를 반복해서 외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실수를 한건 나인데 당황스러움에 눈물이 나기 직전이었다.
그동안 두 번의 알바를 하면서 내가 느꼈던 사실 중에 하나는 고객은 생각보다 무섭다는 것이다. 내가 실수를 하는 모습을 잘못 보이기라도 하면 그것은 큰 클레임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나를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사람까지. 처음 알바를 시작한 다음 한동안은 퇴근 후 가족들에게 힘들다고 징징대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은 똑같았다. 사회란 원래 그렇다는 것. 남의 돈 버는 것은 원래 힘들 다는 것.
이번에도 역시 그런 반응이 나올 것이 뻔했다. 어쩌면 아직도 실수를 하냐고 나를 놀려댈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장님이나 매니저님이 알게 된다면 나는 얼마나 혼날지.... 손으로는 열심히 옷과 바닥의 맥주를 닦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수많은 걱정과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상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손님의 반응이 들렸다.
"학생 아니에요? 오늘 학교 안 가고 알바 중인 거예요?"
정말 예상밖의 질문이었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고개를 들고 손님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봤다. 엄청난 실수에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내 표정과는 다르게 적장 맥주 쏟김을 당한? 손님은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만약 반대 입장이었다면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로 당장 소리를 지르며 이게 무슨 짓이냐고 화를 냈을 것 같았는데 이분은 너무나 차분하고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네... 오늘 공강이라서 근무하는 중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 공강. 좋네요. 저도 어차피 미팅 끝나고 집으로 갈 거라서 괜찮아요."
손님은 중요한 미팅을 마친 뒤, 잠시 점심 식사 겸 매장에 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걱정하는 나를 보고 오히려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20살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한 실수를 너그럽게 봐주고 포용해 준 사람은.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신 매니저님이 뛰어와 손님께 정중히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세탁비라도 드리고 싶다며 죄송함의 뜻을 전달했다. 하지만 손님은 한사코 괜찮다며 세탁비를 거절하고는 그저 흘린 맥주가 아까우니 맥주만 새로 다시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그 손님이 식사를 다하고 가게를 나가기까지 근무하는 시간이 굉장히 더디게 가는 것 같았다. 나의 모든 신경은 옷이 홀딱 젖어있는 손님에게 쏠려 있었고, 아무렇지 않게 반응해 준 고마움에 뭐라도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 큰 사건을 제외하고는 손님은 식사를 잘 마무리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의 매니저님은 손님께 세탁비를 드리는 대신 음식값을 받지 않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를 드렸다.
이 분을 만나서 그랬던 것일까.
그때 보다 더 큰 어른이 된 지금
나는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어딜 가서 아르바이트생이 실수해도 그럴 수 있다고 웃어넘기고, 내가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오더라도 최대한 참고 기다린다. 내가 이런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날 따뜻함으로 실수를 감싸 준 손님의 영향이 크다. 그분의 정확한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 그 이미지가 생생히 떠오른다. 사회에서 나에게 비슷한 상황이 올 때마다 그분을 생각하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맥주 1700cc로 홀딱 젖었지만 갓 사회에 입문한 나를 이해해 준 그분은 진정한 어른이었다. 어쩌면 그분도 과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실수를 저질렀거나 가정에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자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반응을 보인 어떤 이유가 있었던지 그 손님은 내가 조금 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좋은 거름을 줬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지금의 내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따뜻함을 주는
그런 선순환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면 좋겠다.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게 글을 마무리하면 좋겠지만 사실 사고를 친 그날의 마무리까지는 아름답지 않았다. 그렇게 손님이 가고 난 뒤, 나는 자리에 남아 있는 맥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맥주는 생각보다 흔적을 많이 남겼고, 쏟으면 바닥이 찐득해진다는 사실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 더. 매너저님께 따로 사무실로 불려 가 꽤 긴 시간 나의 칠칠맞음에 대해 눈물 콧물 다 빼게 혼이 났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