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파계승인가, 성자인가
스님이 여성과 사랑하고 아기를 낳았다. 이는 원효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스님이라 하면 깊은 산중에서 수행에 전념하는 모습을 떠 올린다. 간혹 가정을 이루어 절 안에서 생활하는 스님도 있는데, 이를 우리는 대처승이라고 부른다.
이는 조계종 스님과는 반대되는 삶을 사시는 태고종 스님이라고 불린다.
태고종이 정식으로 인정받은 시기는 조선 후기 무렵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스님은 엄격한 규율 아래 육식금지와 더불어 여자를 멀리하고 오로지 산속에서 수행에만 전념하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요석공주는 신라 무열왕의 딸이다. 그녀는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사망하는 바람에 과부가 되어 집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효와 만나는 과정은 여러 가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으나,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녀와 원효사이에서 설총이라는 아기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원효의 세속명은 경주설 씨이고 이름은 사(思)라고 하며, 그의 문중 족보에 확실히 나타나 있다.
원효의 아들 설총은 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문을 국어 화하여 유학연구를 쉽게 그리고 빨리 발전시키는데 공이 컸다. 즉 이두문자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여 그때까지 존재하던 향찰을 집대성한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와의 인연이야기는 경기도 소요산 자재암이라는 절에 가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원효가 소요산 자재암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에 요석공주가 어린 설총과 함께 그곳까지 찾아갔다고 한다.
요석공주는 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무르면서 원효를 만나기를 원하였다고 전해진다.
원효는 먼 옛날 교통도 없을 터인데,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왜 왔을까요. 좋게 말하면 사랑하는 여인을 잊기 위해서 이고, 나쁘게 말하면 도망쳐서 왔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면서 이미 파계승이 되었고 그 결과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원효가 경주에 남아있었다면 보통사람과 다름없이 집안 살림하는 여자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안 보이는 곳이라야 스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의 말로 하면 원효는 자식의 양육도 책임지지 않는 지탄받아야 할 인물이다. 반대로 요석공주는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일편단심 여인이다.
더구나 자식을 혼자서 키우기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아마도 그녀는 왕의 딸이니 재정적이나 여러모로 육아에 관한 뒷받침은 충분하였으리라 짐작하여 본다.
원효가 머물렀던 절은 한 두 군데 가 아니다. 경주를 중심으로 여러 곳, 전라도 지방에도 몇 군데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많은 장소에 흔적을 남긴 이유가, 그가 불교의 전파를 위해서 인지 요석공주로부터 멀어지기 위함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찌하였던 그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로 칭하며, 스스로를 낮추어 살면서, 저잣거리에서 속새인 들과 어울리며 술판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혹자는 이런 행동을 두고 불교를 대중에게 포교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분도 있고, 수행스님의 입장에서는 그저 그런 파계승의 모습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그는 불교계의 큰 기둥임 에는 틀림없다.
삼국시대 중기 (617-686)에 신라의 승려로 알려진 그는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욱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름이 알려진 스님들에게는 원래 법맥이라는 것이 있는데, 예를 들면 한국 선불교의 근대의 법맥은 경허, 만공, 혜월 등과 같이 도제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원효는 유명세는 있지만 그가 누구의 법맥을 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은 의상대사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유학길에, 밤에 노숙을 하던 중에 밤에 목이 말라 웬 바가지에 물이 고여 있어 맛있게 먹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바가지가 사람의 해골이어 갑자기 구역질이 나게 되는 순간, 매우 크게 깨달아 그 자리에서 춤을 덩실덩실 추며 중국유학을 포기하였다. 즉 그 순간 모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버려서 유학을 갈 필요성이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원효는 평생 활발하게 불교 연구와 저술 활동에 열중했다.
대승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그 내용이 어렵고 난해하다고 평가를 받던 《대승기신론》을 원효가 해석한 주석서 ‘대승기신론소’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중국이나 일본에는 그들 문파의 경전 정도의 대접을 받는다.
《금강삼매경론》 등은 선종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원효는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등에 기반한 풍부한 저술 활동을 통해 동아시아 대승 불교의 대중화와 발전에 여러 영향을 끼쳤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의 저서를 접한 스님들은 원효를 최고의 스승으로 추앙하고 있다.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겼던 만큼, 전근대에는 원효가 보살,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나리에서도 원효사상에 대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